▲ 연대 미상 사진 I
▲ 연대 미상 사진 II
▲ 1985년 갑자신보에 실린 사진
▲ 시조공 묘역 성역화 사업 이전 사진
▲ 시조공 묘역성역화 사업(2004.4.~2005.5.)을 마친 후의 묘소 전경
▲ 2012년 시조공 묘역 수해복구사업 이후의 묘소 전경
소재지 | 慶北 淸道郡 淸道邑 大峴上洞 金陵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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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묘(尋墓) | 1790年 後孫 恩馹始尋(사일시심) |
德亮元河有功(덕량원하유공) | |
尋墓主訟 | 後孫 權(棠林) 善文(杜谷) 宗礪(沙月) |
碑文撰述人 | 驪江(여강) 李鼎秉(이정병) |
$\large\textbf{~~~~~~~~~~~~英憲公 行狀記}$
公은 高麗 明宗二十年(一一九○年)에 誕生하시고 初名은 仲龍이셨다. 高宗五年(一二一八年)에는 契丹 侵入時 平安道 江東地域으로 從軍을 하셨다. 從軍時 防牌머리에 忠孝雙修를 表現하는 詩 一首를 써 놓으신 바 査閱하던 元帥 趙冲公이 이를 發見하고 感歎을 禁치 못하였 는데 바로「國患臣之患 親憂子所憂 代親如報國 忠孝可雙修」의 詩였음이다. 이 詩가 後日 楯頭詩란 이름으로 後孫은 勿論 世人의 忠孝思想에 龜鑑이 되었다. 高宗六年(一二一九年) 趙冲公이 科擧의 知貢擧가 되어 科試가 있었는데 이때 公은 壯元及第하시고 全州司錄을 始作으로 寶文閣校勘, 秘書少監, 晋州牧使, 全羅道按察使, 慶尙道按察使, 同知樞密院事, 政當文學吏部尙書, 中書侍郎平章事의 官職을 順次 歷任하시고 最高位職 正一品의 太傅로 致仕하셨 다. 高宗四十五年(一二五八年) 蒙古侵入과 民心騷擾로 西北道가 不安할때 公은 官職 陞差와 함째 鎭撫使로 派遣되어 蒙古에 蹂躪된 四十餘城을 收復하시는 큰 功을 세우심에 나라에서는 公에게 封號를 下賜하셨으니 바로 鰲山君이셨다. 鰲山은 淸道의 옛 地名임에 이때 公의 春秋가 六十九歲시고 我貫은 이때부터 비롯되고 以后 高麗朝에서 朝鮮朝에 이르기까지 名門勢族의 姓과 本으로 있게 되었다. 公은 元宗 二年(一二六一)에 同知樞密院事로서 科試의 首長인 知貢擧가 되시어 進士及第者를 選拔하시기도 하였으며 公職에 계시는 동안 公明正大하여 名臣으르 尊敬받았으며 特히 詩文이 卓越하여 後世에 이르러 高麗朝의 十大 文士로 指稱되기도 하셨다. 公의 配는 南平文氏로 外國의 使臣을 迎接하는 官職인 典客令의 元奎公 女이시고 墓와 碑는 失傳으로 生卒年代는 알 수 없다. 公의 卒은 元宗七年(一二六六年) 二月 이시니 享年 七十七歲셨다. 나라에서는 公의 行蹟에 符合하는 諡號를 내렸음에「德正應和曰英 行善可紀曰憲」內容으로 英憲公이라 하였다.
$\scriptsize\textsf{~~英憲公誕辰 八百十四年(西曆 二ΟΟ四年 陰 十月)\\}$
$\normalsize\textbf{~~~~~~~~~~~淸道金氏大宗會 記}$
$\normalsize\textbf{~~~~~~~~~~~~~~~중수기(重修記)}$
지난 2004년 4월부터 1년여에 걸쳐 시조공 묘역 성역화 사업을 하여 마침내 2005년 5월에 끝을 맺었다. 시조공 묘역 입구에 2개의 비(碑)가 세워져 있으며, 좌측의 비(碑)는 성역화 사업의 내력을 기록한 중수기(重修記, 내용 아래 참조) 비(碑)이며, 우측은 시조공 묘역의 표석이다.
시조(始祖)께서 졸(卒)하신지 어언 七三九의 세월이 흘렀다. 한때 후손들이 묘역을 돌보지 않아 퇴락(頹落)의 슬픔도 보았다. 시조(始祖)께서는 우리 후손들만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 고려시대 삼공(三公)의 한분이셨고 큰 학자이시셨다. 그리하여 후세까지 그 명성은 물론, 추앙(推仰)받는 큰 인물로 남으셨다. 그러한 인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유택(幽宅)은 속인(俗人)과 다름없는 모습을 보여 왔으며, 특히 비석과 문관석(文官石) 등 석물들은 초라하여 뜻있는 자로 하여금 탄식을 금치 못하게 하였다. 이에 오늘의 후손들은 분연히 일어나 유택중수(幽宅重修)를 하는 것에 큰 뜻을 모으고 후손들이 천세만세(千世萬世)에 걸쳐 기릴 것을 바래 성역화(聖域化) 작업을 하였다. 공사는 西記 二○○四年 四月에 착공하여 이듬해 五月에 끝을 맺었다. 비문(碑文)은 三一世 정현(丁鉉) 후손이 찬문(撰文)하였다. 중수공사에 헌성금(獻誠金) 예(禮)를 올린 제종인(諸宗人)의 명단은 후면에 기록하여 후세에 귀감으로 삼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