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 목 | 문화재자료 제415호 (경산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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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 칭 | 경산구연정(慶山龜淵亭) |
분 류 | 유적건조물 / 주거생활/ 조경건축/ 누정 |
수량/면적 | 281㎡ |
지 정 일 | 2002.02.14 |
소 재 지 | 경북 경산시 진량면 내리리 176-1 |
(대구대학교 內) | |
시 대 | 조선시대 |
소 유 자 | 청도김씨식송공파삼고문중 |
관 리 자 | 경산시 |
상세문의 | 경상북도 경산시 문화공보담당관실 |
054-811-9021 |
조선 헌종 14년(1848)직재(直齋)김익동(金翊東)선생이 건립한 정자로서 현재 대구대학교 캠퍼스 내에 위치하고 있으며 금호강을 굽어보는 암벽 위에 북동향으로 자리잡고 있으며 주변 경관이 매우 좋다. 그리고 정자 뒤편 우측 암벽 위에 1972년 이건한 선생의 사당이 자리하고 있다. 금호강변 좁은 암벽 위에 터를 잡은 관계로 건립지의 크기에 맞도록 정면 2칸, 측면 2칸의 아담한 건물을 세웠다. 전·측면 모든 칸살을 7자로 잡아 정방형을 이루고 있다.
금호강을 내려다 볼 수 있는 전면 2칸은 주변 경관을 조망하기 편하도록 마루를 들였고 뒤편 2칸은 온돌방을 두었다. 그리고 온돌방 뒤편에 퇴를 두어 정자로 들기 편하도록 배려하였다. 현재 정자의 창호는 모두 없어져 창호의 형태와 개폐방법은 알 수 없으나 문틀에 남아있는 돌저귀의 흔적으로 개폐방법을 추정할 수 있다. 마루 전면은 하부에 높은 머름을 두고 4분합창문을 설치한 듯하며 좌측면은 마루로 오를 수 있는 쌍여닫이 판문을 두고 우측면에는 전면과 동일한 머름을 설치한 것으로 보아 쌍여닫이 창문이 설치된 듯하다. 그리고 온돌방과 마루와는 3분합문을 둔 듯 마루 서까래에 걸쇠의 흔적이 남아있으며, 온돌방 사이는 하부에 문지방이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문으로 구획된 듯 하다. 또한 방 좌우의 창호는 높은 머름을 둔 것으로 보아 창문을 설치한 듯하며 문틀의 연귀수법은 온연귀수법으로 창호 설치의 세심함을 살필 수 있다. 건물의 입면은 누각형의 정자를 건립하기 위한 배려라 할 수 있는 장주형(長柱形)초석을 전면에 놓고 그 위에 귀틀을 얹은 후 원주를 세워 건물고를 다소 높혔다. 기둥의 형태는 전 ·후면 주열(柱列)은 원주(圓柱)를 사용하고 측면과 내진주(內陣柱)는 방형을 택했다. 주상의 형식은 전면은 살미가 짧은 이익공형식에 주간 사이는 소로를 삽입한 형식이다. 방 천장은 우물반자로 처리하고 마루 상부는 선자연(扇子椽)서까래와 외기반자로 마감하여 내부공간이 아늑하다. 건물 상부 구조수법은 지붕을 합각으로 처리하기 위한 독특한 구조법을 사용하였다. 건물 가운데 세운 내진주 위에 대량(大樑)과 충량(衝樑)을 합보시킨 후 그 상부에 사압(四押)의 외기를 얹은 다음 추녀를 받도록 구조를 만들었다. 따라서 외기 위에 합각이 형성된 관계로 용마루의 길이가 짧아지고 처마의 만곡도가 매우 크다.
또한 건물 규모에 비해 추녀를 많이 내민 관계로 추녀가 둔탁하게 느껴졌던지 추녀 하부를 2단으로 치목하여 언 듯 보아 추녀 위에 사래가 얹혀진 듯 하다. 건립연대는 19세기 중반으로 후대에 건립되었으나 주변경관에 적합토록 건물을 조성한 수법에 그 가치가 있다. 또한 건축수법에도 상부결구법 및 창호수법, 와곡의 처리 등 여러 곳에서 전통적 기법과 재치가 있는 결구법 등 여러 면에서 조선 후기의 정자건물로서 보존할 가치가 있는 자료로 평가된다.
자료출처 : 문화재청
대구대학 경산캠퍼스 후면, 진량면 내리리 금호강변 절벽 가운데 자리한 구연정은 청도 김씨 직재 김익동이 독서와 풍류를 위하여 1849년(헌종 15년)에 건립한 정사이다. 김익동은 만각 김구옹의 아들로서 순조 때 성균관 진사시에 올랐다.
사각 정자가 거북의 등에 타고 있는 형태이다. 굽이굽이 흐르는 강수, 강수의 흐름에 따라 세운 듯한 바위 병풍, 솔, 단풍, 느티나무 등 수목은 사시에 따라 정취를 달리한다.
이 자연의 정취가 한 점에 모인 곳에 세운 정자, 바위를 파서 기둥을 세운 구연정은 실적 네 칸의 정사각형 건물이다. 그래서 직방재라는 재호가 붙어 있다. 정자 후면 벼랑 쪽에 한 칸 방 두 개, 전면 강류 쪽 두 칸은 청마루로 이루어져서 들창문만 열어 올리면 금호강이 눈앞에 펼쳐진다. 정자는 치밀한 의장을 다하여 만들어진 흔적이 역력히 엿보인다. 청마루의 반궁륭형 천장에 있어 더욱 정교한 조형의 미를 이룩하고 있다. 산수의 미와 인공의 미를 일점에 묶어 놓았다.
당시 이 구연정을 찾아든 사방의 시인 묵객이 수천에 달하였다고 기문에 적혀 있고 청마루 벽상에는 귀연정에서 읊은 빈객의 시를 새긴 나무 액자가 가득 두르고 있음을 볼 때 구연정 주인 김익동 진사의 풍류와 넓은 교의를 엿볼 수 있다.
자료출처 : 경상북도청 관광진흥과
구연정은 작지만 아름답기 그지없는 정자다. 주소는 경산시 진량읍 내리리로 나오지만, 현재 대구대학교 경내 비호동산의 한쪽에 자리 잡고 있어 각별한 관심을 가진 이가 아니라면 찾기조차 쉽지 않다.
정자는 우선 그 입지부터 실로 절묘하기 짝이 없다. 그리 높지 않은 용전산(龍田山)의 구릉이 금호강의 물길을 따라 서남쪽을 향해 구불구불 이어지는데, 강 쪽은 깎아 세운 듯한 절벽이다. 그 강변 절벽 가운데에 금호강을 향하여 거북 모양의 큰 바위가 머리를 강으로 향한 채 튼실한 두 앞발로 강의 수면을 누르고 있다. 기이한 이 거북바위의 등껍질을 초석으로 삼아 정자를 지었으니, 구연정의 ‘구(龜)’는 이를 빌려 작명한 것이다. 그래서 정자에 가려면 용전산의 산등성이를 넘어 아슬아슬한 벼랑길을 조심조심 내려가야만 한다.
지금은 정자 앞 금호강 건너편에 제방을 쌓아 물길도 변하였고 상류로부터 토사가 내려와 쌓여 강바닥도 얕아졌지만, 일제강점기까지만 해도 정자의 풍광은 많이 달랐다고 한다. 정자에서 멀리 마주 보이는 영천 금호로부터 큰 강줄기가 평야를 가로지르며 거북 바위 쪽으로 곧바로 직진하여 바위 앞에서 깊고도 푸른 소(沼)를 만들었다. 팔뚝만 한 잉어가 노닐던 소는 명주실 한 타래를 풀어야 바닥에 닿을 만큼 그 깊이가 깊었다고 전해진다. 정자 이름에 ‘연(淵)’이 쓰인 까닭이다. 필자는 마침 한겨울에 구연정을 산책하게 되어 아쉽게도 멋진 풍광을 감상할 기회를 잃었다. 하지만 정자를 병풍처럼 두른 바위 절벽에 매달린 단풍나무⋅소나무⋅느티나무 등 울창한 수목들을 보면서 가을이 깊어져 형형색색 단풍으로 물들고 그 모습이 다시 금호강 수면에 비치면 그림 같은 절경이 나타났을 것임을 쉽게 떠올릴 수 있었다.
거북 바위 위에 살포시 앉은 정자의 건축 구조도 범상하지 않다. 그리 넓지 않은 거북등 위에 건물을 앉히려니 규모를 정면 2칸, 측면 2칸의 정방형으로 설계할 수밖에 없었다. 정자에 걸린 ‘직방재(直方齋)’란 편액에는 이런 건축적 특징이 반영되어 있다. 바위를 파서 기둥을 세운 정자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면 강 쪽 전면 2칸에는 마루가, 벼랑 쪽 후면 2칸에는 온돌방이 마련되어 있다. 전면 2칸 크기의 마루에 앉아 들문을 밀어 올려 걸면, 정자 앞의 용소(龍沼)와 금호강의 푸른 물줄기, 강의 좌우 쪽에 펼쳐진 영천 금호까지 이어지는 넓은 평야가 한눈에 들어왔다. 후면의 2칸 온돌방은 겨울철 한기를 이겨내면서 독서와 수양 그리고 강학을 했던 공간일 것이다. 좁은 공간을 적절하게 배분⋅활용하려 한 정자 주인의 지혜가 엿보이는 대목이다.
구연정은 뛰어난 풍광과 정자 주인의 명성으로 수많은 시인 묵객과 학자들이 방문하는 명소 중의 하나였다. 옛날 구연정에는 찾아온 빈객들이 그 곳에서 읊은 시문을 새긴 현판이 벽면을 가득 두르고 있었다고 한다(지금은 도난을 염려하여 다른 곳에 보관 중이다). 현재 대구대학교 비호동산의 테니스장으로 변한 자리에 정자를 창건한 김익동 공의 본가가 있어, 구연정에 손님이 들 경우 본가에서 음식을 장만하여 그 음식상을 집 뒤편의 구릉을 넘어 벼랑길을 통과해 날라다가 손님들을 대접했다고 한다. 창건자 김익동 공의 손자인 김덕재(金德在) 옹은 그의 조부 생존 당시까지도 언덕 위 이곳저곳에는 구연정을 찾은 손님들이 타고 온 말과 노새가 고삐에 묶인 채 한가롭게 풀을 뜯었고, 본가에서는 접대 음식을 장만하여 그것을 정자까지 나르느라 부산을 떨기도 했다고 회고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