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갑자신보(1985)에 실린 사진
후세들에게 충효사상을 일깨워주기 위하여 시조 영헌공과 후손인 남강 김응룡(南岡 金應龍), 식암 김몽룡(息巖 金夢龍), 모헌 김희방(慕軒 金希邦)을 모신 서원이다. 시조를 제외한 3인은 모두 임진왜란때 구국(救國)을 위해 백의종군하여 공신이 되고 관직을 제수받은 인물이다. 서기 1881년에 세워졌고 처음에는 남강과 모헌만 배향(配享)하였다가, 1981년에 와서 시조와 함께 식암도 뫼시었다. (1993년 김수형(金秀馨)을 추가로 배향함.) 건물에 각각 의미있는 칭호를 두었는데 祠(사)에는 尙忠(상충:항상 충의정신을 갖는다는 뜻), 堂(당)에는 景義(경의:언제나 빛나는 의의 정신을 갖는다는 뜻), 門(문)에는 雙修(쌍수:충과 효를 함께 닦는다 하는 뜻)라 하여 사왈상충(祠曰尙忠), 당왈경의(堂曰景義), 문왈쌍수(門曰雙修) 등 세 이름이 있다.
소재지 : 전북 고창군 상하면(上下面) 검산리(劍山里) 400번지
향사일(享祀日) : 음력 2월 19일
사당 상충사(祠堂 尙忠祠) | 3간(間) 목조 와즙(木造 瓦葺) 9평 |
---|---|
경의당(景義堂) | 4간(間) 양와(洋瓦) 14평 |
감모재(感慕齋) | 5간(間) 목조 와즙(木造 瓦葺) 20평 |
내삼문(內三門) | 1동(棟) |
정문 쌍수문(正門 雙修門) | 3간(間) 양와(洋瓦) 7평 |
관리사(管理舍) | 2동(棟) |
향사인물(享祀人物) | |
주벽(主壁) | 김지대(金之岱) 축문: 충효쌍수 위국간정 택피생령 공막여경(祝文: 忠孝雙修 爲國幹楨 澤被生靈 功莫與京) |
배향(配享) | 김응룡(金應龍) 축문: 독학역행 사문고족 적왕소개 위국순절(祝文: 篤學力行 師門高足 敵王所愾 爲國殉節) |
김몽룡(金夢龍) 축문: 거가극효 재국진충 임란장의 누립기공(祝文: 居家克孝 在國盡忠 臨亂仗義 累立奇功) | |
김희방(金希邦) 축문: 창의방난 분충토적 훈거일등 찬사필(祝文: 倡義邦難 奮忠討賊 勳居一等 璨史筆) | |
김수형(金秀馨) 축문: 왕유 공존종 육취청아 궐택역굉(祝文: 王猷 功存宗 育就菁莪 厥澤亦宏) |
▲ <계산서원의 근래 사진> 촬영일 : 2006년 2월 21일 출처:엠파스포토앨범
감모재(感慕齋)에서 ‘감모(感慕)’란 효도하고 우애하여 후손이 마음속 깊이 사모한다는 뜻으로, 『서전(書傳)』 군진(君陳) 편의 글에서 따온 것이다.
[정의] 전라북도 고창군 상하면 검산리 상라대에 있는 조선 후기 김도의가 세운 재실.
[개설] 감모재는 조상을 사모하는 의미에서 지어진 전사청(典祠廳)의 건물로, 전국의 여러 곳에 설립되어 있다. 고창군의 감모재는 김도의(金道誼)[1720~1783]가 세운 것이다. 김도의는 조선 후기 유학자로 자는 의성(義成), 호는 여우정(如愚亭)이며, 본관은 청도다. 전라북도 고창군 상하면 검산면 하라대에서 출생하였고, 호강공(胡剛公) 김점의 후손으로, 부친은 묵헌 김정상이다. 효행과 학문은 고창 내의 사표가 되었다. 김도의는 만년에 5대조의 재실(齋室)을 짓고 감모재(感慕齋)라 하였으며, 서당을 열어 후진 양성에 힘써 많은 인재를 길렀다. 저서로는 『여우유고(如愚遺稿)』와 『검산세고(劍山世稿)』가 있는데 『검산세고(劍山世稿)』에 합철 간행되었다.
[위치] 고창군에서 국도 22호선을 타고 상하면 우체국 못 미쳐 검산리 상라대에 있다. 감모재는계산서원 안에 있는 사당이다.
[변천] 고창군 감모재는 김도의가 18세기 후반에 세운 것이나 일제 강점기 때 보수가 이루어졌다.
[형태] 정면 3칸, 측면 2칸의 건물로, 앞 퇴칸을 만들어 통행이 편리하도록 하였다. 앞 퇴칸의 기둥, 주초석, 배면의 기둥은 원형의 형식을 따랐고, 건물 본체의 정면 주초석과 기둥은 각기둥을 사용하였다. 익공계 맞배지붕으로 앞 퇴칸의 창방과 도리장여 사이에 화반을 두었고, 우주의 귀포는 무겁게 올려 있다.
정면에는 각 칸마다 2분합문을 달았는데, 중방을 기점으로 아래는 판문 형식이고, 위쪽은 빗살문 형식을 취하고 있다. 측면은 1칸으로 창방, 중방, 중하방으로 칸을 나누고 흙벽으로 만들었으며, 건물의 양쪽에 방풍판을 달았다. 배면에는 각 칸마다 중깃과 수장재를 열십자로 엮고 흙벽으로 미장하였다. 겹처마 지붕으로 서까래와 부연에 백색, 기둥과 창방 등 나머지 목부재에는 석간주의 단청을 한 매우 간소하고 간략한 건물이다.
[현황] 관리가 잘 이루어지고 있는 편이지만 건물 오른쪽에 회벽을 만들면서 흘러내린 자국이 있다. 또한 건물 뒤에 축대를 견치돌로 쌓았고 담장은 전통 형식을 지니고 있어 어색하다.
[의의와 평가] 원래의 건축 형식은 18세기 후반의 익공 건물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그러한 전통을 고수하다가 일제 강점기 때 변형된 것으로 보인다.
감모재 자료출처:http://m.grandculture.net/contents.aspx?use=&ct=C&ctid=C00007&contid=GC02800590&mode=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