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side> 💡 1513년 중종때 통덕랑을 지낸 김일동(金逸東)을 추모하기 위해 1910년에 후손들이 세운 재실(齋室). 김일동(金逸東)은 호강공(胡剛公) 김점(金漸, 8世)의 둘째아들인 9世 의손(義孫)의 2男으로 거창계(居昌系)의 입향조(入鄕祖)이시다.
내오리의 명칭은 오무 마을과 관련된 지명이다. ‘오무’는 15세기 청도(淸道) 김일동(金逸東)이 이곳으로 옮겨온 후 고향 청도의 옛 이름 글자인 ‘오(鰲)’ 字를 써서 ‘오산(鰲山)’으로 바뀌었다가, ‘오무’로 변했다. 오무의 안과 밖을 구분해 바깥 오산과 안쪽 오산을 구분하며, ‘내오’라는 지명이 생겨났고, 안쪽 오산에 해당하는 지역이 대부분이라 내오리가 되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고반재, 반계정, 재간당 등의 정명(亭名)은 모두 아래에서 출발한다.
시경 위나라노래衛風 중에 오두막집에 사노라(考槃고반)라는 노래가 있다.
考槃在澗(고반재간) 개울가에 오두막 지어 지내나니 碩人之寬(석인지관) 어진 사람의 넓은 마음이라 獨寐寤言(독매오언) 자나깨나 저혼자 중얼대는 말이 永矢弗諼(영시불훤) 이 삶을 잊지말자 다짐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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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출처] 청도김씨 - 김일동의 고반재(考槃齋)1910년|작성자 허생(https://blog.naver.com/iiha/223343069036)
고반재 위치 : 경상남도 거창군 주상면 주곡로 1146-7 (내오리, 고반제) 경상남도 거창군 주상면 내오리 236-1 (고반제)
고반재(考槃齋)
내오리 샛터아을 어귀에 중종 계유(1513)년 청도에서 옮겨와 살게 된 통덕랑 김일동(金逸東)을 기리기 위해 1910년에 후손들이 세운 재실이 있다. 후암 송회헌(後菴 宋會憲)이 글을 짓고 통정 이준학(通政 李埈學)이 상량문을 지었다. 고반재는 재실과 대문간으로 이루어져 있다. 세로방향이 다소 더 길고, 배산하여 배면쪽으로 다소의 경사가 있는 장방형 대지의 뒤쪽으로 재실을 앉히고 재실과 마주보게 단칸의 대문간을 배치하여 자연석을 쌓아올린 돌담장을 둘렀다. 정면 3칸, 측면 1칸 반의 규모로 전면에 퇴칸을 둔 전퇴집 형식이다. 실의 배열은 가운데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1칸씩 방을 드렸는데 좌측 방의 배면에 벽장을 시설한 것 외에 평면상 확장된 부분은 없다. 마루에는 우물마루를 깔았는데 장귀를과 동귀를, 청판 등 구성 부재의 크기가 모두 작다. 배면 쪽이 높으므로 전면을 높게, 배면을 낮게 하여 토기단을 조성하고 초석을 놓았는데 초석은 자연석을 그대로 사용한 덤벙주초 형식이며 좌우측 기단면에는 각각의 방에 불을 지피기 위한 아궁이가 시설되어 있다. 3칸 규모의 재실에서는 전면 퇴칸에 원기둥을 쓰고 나머지 부분에는 각기둥을 쓰는 것이 일반적인 방법인데, 고반재에는 모든 기둥을 원기둥으로 하여 건물을 축조하였으며 전면 퇴칸의 기둥들과 대청 전면 2개의 기둥에는 주련을 달았다. 방의 정면부븐에는 쌍여닫이 세살문을 달았고, 방의 대청쪽 출입문은 아랫부분에 굽널을 끼운 외짝의 굽널 세살문을 달았으며 방의 측면이나 배면 쪽으로는 문을 내지 않았다. 대청의 뒷벽은 중인방 뿐만 아니라 장방까지의 벽제를 판벽으로 하고 쌍여닫이 판문을 달았다. 퇴칸에는 창방과 처마도리 장여사이에 소로를 끼워 장식하였고 벽체는 심벽으로 회마감하였다. 만인재는 5량가구 형식으로 대들보 위에서 동자주로 마룻보를 받고 마룻보 위에서도 동자주로 종도리를 받게 하였다. 몸채의 전, 후면 기둥에 대들보를 걸고 퇴칸에서는 퇴보를 전면기등에 연결하였는데, 대들보는 휨이 있는 곡재를 그대로 사용하였으며 특히 대청부분의 대들보는 휨의 정도가 크다. 처마는 서까래만 사용한 홑처마 형식이고 지붕은 5량가구에 적합한 합각지붕 형식인데 지붕에는 동을 입힌 기와를 올렸고 용마루 등 기와마루의 끝을 막은 막새기와에는 녹색의 질을 하여 외관상 화려하나 전통미는 없다.
[이상 출처] (하종한),『거창의 문화유산 1』, 거창문화원, 2004, pp.181-183.)
초산재 위치 : 경상남도 거창군 주상면 주곡로 972-14 경상남도 거창군 주상면 연교리 막터
▲ 초산재(椒山齋)
▲ 초산재(椒山齋) 전경
▲ 향토문화유적 초산재(椒山齋) 정비사업 준공 기
초산재(椒山齋)
이조참의(吏曹參議)를 지낸 청도인 김응련(金應鍊)의 묘각(摹閣)으로 후손들이 세운 것으로 막터마을 뒤 내오산 기슭 도로변에 위치해 있다. 순재 김재화(醇齋 金在華)가 글을 짓고 추연 권용현(秋淵 權龍鉉)이 상량문을 지었으며, 뜰에는 권창현(權昌鉉)이 지은 유허비가 있다. 초산재는 재실과 대문, 그리고 유허비로 구성되어 있다. 대지는 산등성이의 아랫자락을 파내고 축대를 쌓아 조성한 것으로 가로방향이 약간 더 길고 경사가 거의 없는 장방형인데 재실을 대지의 뒤쪽에 앉히고 마주보도록 대문을 달아 담장을 둘렀다. 담장은 경사가 낮은 전면 좌측과 죄측면에만 쌓고 기와를 올렸으나 나머지 축대부분은 그대로 대문 및 담장과 연결하였다.
[이상 출처] (하종한),『거창의 문화유산 1』, 거창문화원, 2004, p.1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