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공은 신라 경순왕(敬順王)의 넷째 아들인 대안군(大安君) 김은열(金殷說)의 8세손(世孫)이시다. 서기 1190년(고려 19대 명종(明宗) 20년)에 시중(侍中, 종1품)을 지낸 김여흥(金余興, 水原金氏)의 세째 아들로 태어나시었다. 초휘(初諱)는 중용(仲龍), 시호(諡號) 는 영헌(英憲)이시다. 영헌공(英憲公)은 태어나실 때부터 풍채가 출중하시고 지혜가 뛰어나셨으며, 장성하면서 시(詩)와 문장에 능하셨음은 물론 뜻도 커서 학문에 정진(精進)하심이 남다르셨다. 계명대 이종문교수님의 논문에 시조공의 탄생연도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언급이 있다.

李鍾文,「金之岱의 生涯와 詩世界」(啓明漢文學會,『漢文學硏究』, 제17집, 2003), pp.31-49. 『高麗史』 金之岱 列傳에는 그가 77세에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고, 『高麗史』 世家에는 1266년(元宗 7년)에 金之岱의 사망 기록이 실려있다. 그러므로 『高麗史』의 기록을 수록할 경우 그의 탄생 연도는 1190년에 해당되며, 각종 인명 사전에도 모두 그렇게 되어 있다. 그러나 淸道金氏族譜(丁卯譜)에는 金之岱가 1200년에 태어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그의 후손이 金之岱의 시문 및 관련 기록을 모아 간행한 『英憲公實記』에서도 『高麗史』의 기록이 잘못된 것으로 보고 丁卯譜의 기록을 따르고 있다.

1984년도에 발간된 '갑자신보'에도 1190년도에 탄생하신것으로 되어있다. 시조공이 탄생하신 1190년도는 고려 19대 명종(明宗, 1131~1202)이 재위한지 20년이 되는 해이고, 중국은 남송(南宋)과 금(金)나라가 세워진 시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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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역 고려사 : 열전

김지대

김지대(金之岱)는 처음 이름이 김중룡(金仲龍)으로, 청도(淸道 : 지금의 경상북도 청도군) 사람이다. 용모가 훤칠한데다 높은 기개와 큰 뜻을 지녔으며, 열심히 공부해 글을 잘 지었다.

고종 4년(1217) 강동성(江東城 : 지금의 평양특별시 강동군) 전투에 부친 대신 종군해 전투에 참가했다. 군사들이 모두 방패에 괴수를 그렸으나, 김지대만은,

나라의 근심은 신하의 근심이요, 어버이의 걱정은 자식의 걱정이라. 어버이 대신해 나라에 보답할 수 있다면, 충·효를 둘 다 이룰 수 있으리.

라는 시를 써 붙였다. 원수(元帥) 조충(趙冲)이 열병하던 중 이것을 보고 놀라 그 까닭을 물어보고는 내상(內廂)$^{\color{saddlebrown}{1)}}$으로 불러들여 중용하였다. 이듬해 조충이 지공거가 되어 과거를 주관했는데 김지대가 장원으로 급제$^{\color{saddlebrown}{2)}}$하였다. 전례에 따라 전주사록(全州司錄)에 임명되자,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을 구휼하고 세력 있는 향호들을 억눌렀으며, 귀신과 같이 잘못을 적발하니 향리와 백성들이 존경하고 두려워하였다. 내직으로 들어와 보문각교감(寶文閣校勘)으로 임명되었다가 뒤에 전라도 안찰사(按察使)로 나갔다.

당시 최이(崔怡)의 아들인 승려 만전(萬全)$^{\color{saddlebrown}{3)}}$이 진도(珍島 : 지금의 전라남도 진도군)의 한 사원에 주지로 있었는데, 문도들이 함부로 횡포를 부렸다. 통지(通知)라는 자가 특히 심하였는데, 김지대는 그가 청탁하는 것을 모두 거절하고 들어주지 않았다. 김지대가 그 사원에 들르자, 만전이 거들먹대며 욕설을 퍼붓고는 만나려 하지 않았다. 김지대가 곧바로 들어가 마루에 오르더니 마루에 있던 피리와 거문고를 잡고 비장한 가락을 몇 차례 연주했다. 이에 만전이 혼연히 나와, “마침 몸이 조금 아파 공이 오신 것을 알지 못하였습니다.”라며 사과한 후, 함께 즐겁게 술을 마셨다. 그 자리에서 십여 가지의 일을 부탁해 오자 그 자리에서 해결해 준 뒤 몇 가지 일을 보류하면서, “행영(行營)에 가야 해결되는 일이오니 통지를 보내면 좋겠습니다. 제가 기다리지요.”라고 속였다. 행영으로 돌아온 며칠 뒤 과연 통지가 왔기에 김지대가 그를 결박시키고 죄를 따진 뒤 강에 던져버렸다. 만전은 곧 최항(崔沆)인데, 이 일을 두고 묵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으나, 김지대가 청렴하고 조심하는데다 허물이 적었으므로 끝내 그를 해치지 못하였다.$^{\color{saddlebrown}{4)}}$

그 후 여러 차례 승진해 판사재시사(判司宰寺事)가 되었다. 당시 몽고 군사들이 북쪽 변경을 침범했는데, 지병마사(知兵馬事) 홍희(洪熙)가 여색을 좋아하여 군무에 충실하지 않으므로 그 지방의 민심이 등을 돌렸다. 김지대가 재주와 책략이 있다 하여 첨서 추밀원사(簽書樞密院事)로 승진시켜 홍희를 대신해 진수하게 하자, 은혜와 믿음으로 위무하였으므로 서북 지방 40여 성이 그 덕분에 안정을 찾았다.

원종 초 정당문학·이부상서에 임명되었으나, 곧 글을 올려 나이를 이유로 퇴직을 청하자 수태부(守太傅)·중서시랑평장사로 올려 주고 물러나게 하였다. 병이 들자 머리를 깎고 앉은 채 세상을 떠나니 그 때 나이가 일흔일곱이었으며, 시호를 영헌(英憲)이라 하였다.

애초 김지대가 도성 남쪽에 사는 어떤 노인이 점을 잘 친다는 말을 듣고 그를 찾아갔다. 노인이 맞아들여 점을 치더니, 자기 어린 딸더러 뜰아래에서 그에게 절을 올리게 한 후, “이 분은 뒷날 반드시 귀한 자리에 올라 네가 은혜를 입게 될 터이니 똑똑히 보아 두어라.”고 일렀다. 20년 뒤, 김지대가 전라도 안찰사로 있으면서 많은 도적떼를 옥에 가두었다. 김지대가 죄수들을 조사하고 있는데, 한 아낙네가, “옛날 성 남쪽에 살던 늙은이의 딸인데 불행하게도 이 지경이 되었습니다.” 하고 부르짖었다. 김지대가 깜짝 놀라 석방시킨 뒤 후하게 위로하여 내보냈다.

각주

1) 내상 : 상(廂)은 영군(領軍)을 가리킨 것으로 내상이란 각 도의 군영(軍營)을 말하며, 여기서는 원수가 거느리는 군영을 말한다.

2) 급제 : 고종 6년(1219) 5월 지공거 조충(趙冲)과 동지공거 이득소(李得紹)가 주관한 과거에 김지대가 허수(許遂) 등과 함께 급제한 사실을 말한다. 한편 그는 같은 왕 42년 6월에 동지공거로서 지공거 최온(崔溫)과 함께 과거를 관장하여 곽예(郭預)·김수(金須) 등을, 원종 2년(1261) 5월에는 동지공거 정지(鄭芝)와 함께 정겸(鄭謙)·김애(金皚)·고적(高適) 등을 각각 선발하였다.박용운, 『고려시대 음서제와 과거제연구』, 일지사, 1990, 412·417~418·428쪽.

3) 만전(1208~1257) : 무인집권자 최이(崔怡)와 기생 서련방(瑞蓮房) 사이에 태어난 둘째 아들 최항(崔沆)을 말한다. 고종 6년(1219) 형 만종(萬宗)과 함께 수선사(修禪社)의 진각국사(眞覺國師) 혜심(慧諶)에게 출가하였다가 같은 왕 35년 환속한 후, 이듬해 정권을 장악하여 무인집정이 되었다. 그에 대해서는 『고려사』 권129, 열전42, 반역, 최충헌 부 최항전 참조.김용선 편, 「최항 묘지명」 『고려묘지명집성』, 한림대출판부, 2001.

4) 해치지 못하였다 : 정권을 장악한 이후 최항(崔沆)이 최이(崔怡)의 측근세력으로 활동하면서 그의 권력 승계에 반대한 김지대(金之岱)를 마음대로 제거하지 못한 사실을 말한다. 그 이유는 김지대 개인의 품성만 아니라, 송국첨(宋國瞻)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의 제거에 따른 관료들의 반발을 우려했기 때문이다.김당택, 『고려무인정권연구』, 새문사, 1987, 209~21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