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부시랑(刑部侍郞)이 되었다가 1247년(高宗 34년) 동남로안렴사겸부행(東南路按廉使兼副行)으로 나감.
공이 형부시랑(刑部侍郞)의 관직에 있으면서 동남로안렴사 겸 부행(東南路按廉使 兼 副行)이란 직책으로 몽고침입을 방어하는 임무를 띄고 경상도 지방에 출진한 일도 있었다. 동남로는 바로 동남방면을 의미한 것이다. 안렴사는 안찰사와 같은 뜻으로 지방수령의 관직이다. 당시 몽고군은 고려의 전 국토를 휩쓸다 시피 하였다. 전란으로 인하여 황폐하고 민심이 흉흉한 곳을 조정에서 책임관을 보내 안렴하는 일이 있었다. 영헌공 김지대는 그러한 직무에 있기도 하였다. (김정현(金丁鉉),『영헌공김지대』,도서출판고산자의후예들, 2004, p.42.)
보한집 > 보한집(補閑集) 권하(卷下) > 정미년(1247) 봄에 나라에서 오랑캐[胡宼]를 방어하기 위하여
정미년(1247) 봄에 나라에서 오랑캐[胡宼]를 방어하기 위하여 삼품관(三品官)을 진무사(鎭撫使)로 삼아 세 방향으로 나누어 파견하였다. 그 때 장원(壯元) 김지대(金之岱)가 형부시랑(刑部侍郞)으로서 동남로안렴사(東南路按廉使) 겸 부행(副行)이 되었다. 정월 초하루에 진무사에게 하례하는 글[賀狀]을 올렸는데, 그 글에 이르기를,
‘계인(鷄人)이 새벽을 알리니, 초호(楚戶)의 닭들까지 다투네.
왕의 조서[鳳詔]가 새봄을 반포하니, 순지(荀池)의 봉황(鳳凰)에게 목욕을 재촉하네.
삼가 생각하건대, 패왕(霸王)의 지략을 품고 천지(天地)에 통하였으니 유사(儒士)라고 하네.
문화공(文和公, 최유선)과 문헌공(文憲公, 최충)의 가문은 선을 쌓았으니[積善] 반드시 경사가 있을 것이네.
사업(司業)과 사성(司成)에서 육개월만에 뛰어오른 것은 일찍이 어려운 일이 아니었네.
아침에 인재를 선발하는 권한[權衡]을 미처 거두어들이지도 않았는데, 저녁에 곧 군문[戎門]의 권한[節鉞] 수여하셨네.
밖을 제어한 위엄과 명성은 두 해였는데, 물고기와 새들도 〈공적을〉 알게 되었네.
변방을 안정시킨 공로와 업적에 온 나라가 노래하며 태평함에 취하였네.’
라고 하였다. 이틀 만에 제서(除書)가 도착하니, 진무사로서 우복야(右僕射)가 되었다. 김지대가 또 하장을 지어 축하하여 읊기를,
‘새로 내리신 조서는 먹물이 마르지도 않은 글자가 천리를 왔으니,
전에 드린 글에 봉황이 목욕한다는 말은 삼일 만에 징험(徵驗)이 있었네.
공손히 생각하건데, 그 재주와 명성은 세상을 덮었고, 덕과 행실은 무리에서 뛰어났다네.
네 명의 왕을 섬기며[四朝] 황각(黃閣)에 오르니, 아버지도 재상이며 아들도 재상이네.
홍전(紅牋)은 일곱 대에 이어져, 할아버지도 문장(文章)이며 손자도 문장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