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사 > 열전 권제15 > 제신(諸臣) > 김지대
김지대(金之岱)는 초명이 중룡(仲龍)으로, 청도(淸道) 사람이다. 풍모가 우뚝한데다 대범하고 빼어나 큰 뜻을 지녔으며, 학문에 힘써 글을 잘 지었다. 고종(高宗) 4년(1217) 강동성(江東城) 전역(戰役)에 부친 대신 군대를 좇아서 〈전쟁에〉 나갔다. 부대의 병사들이 모두 방패 머리에 기이한 짐승을 그렸으나 김지대만은 홀로 시를 지어서 〈방패에〉 썼는데 이르기를, “나라의 근심은 신하의 근심이요, 어버이의 걱정은 자식의 걱정하는 바라. 어버이 대신해 나라에 보답할 수 있다면, 충과 효 둘 다 이룰 수 있으리.”라고 하였다. 원수(元帥) 조충(趙冲)이 병사들을 점검하다가 이것을 보고 놀라 물어보고는 내상(內廂)으로 불러 그를 기용하였다. 이듬해 조충이 지공거(知貢擧)가 되었는데 김지대가 장원으로 뽑혔다. 전례대로 전주사록(全州司錄)으로 보임되었는데, 고아와 과부를 구휼하고 호강(豪强)을 막았으며, 적발하는 것이 귀신같으니 향리와 백성들이 공경하면서도 두려워하였다. 내직으로 들어와 보문각교감(寶文閣校勘)으로 제배되었다가 후에 전라도안찰사(全羅道按察使)가 되었다.
최이(崔怡)의 아들인 승려 만전(萬全)이 진도(珍島) 한 절의 주지로 있었는데, 그 승도들이 제멋대로 하였다. 통지(通知)라 칭하는 자가 특히 심하였는데, 그가 청탁하는 바에 대해 김지대는 모두 거절하면서 행하지 않았다. 일찍이 김지대가 그 절에 갔는데, 만전이 업신여기고 욕하며 보려 하지 않았다. 김지대는 곧바로 들어가 당(堂)에 올라 당 위에 악기로 피리를 여러 차례 마음대로 다루고 거문고를 잡고는 이를 연주하였는데, 음절이 비장하였다. 만전이 기뻐하며 나와 말하기를, “마침 미질(微疾)이 있어 공이 여기 이르신 것을 몰랐습니다.”라고 하고는 서로 즐거이 술을 마셨다. 이로 인하여 10여 가지의 일을 청탁하자 김지대는 즉각 이를 행하면서 몇 가지 일을 보류하고는 말하기를, “행영(行營)에 가야 가부를 알듯하니 통지(通知)를 보내어 결과를 기다리시지요.”라고 하였다. 행영으로 돌아온 지 며칠이 지나자 통지가 과연 이르렀기에 김지대가 그를 결박토록 하고는 그의 불법을 질책하고 강에 던져버렸다. 만전은 곧 최항(崔沆)으로 비록 이 일에 유감이 있었으나, 김지대가 청렴하고 근면한데다 허물이 적어 끝내 해칠 수 없었다. 여러 번 관직을 옮겨 판사재시사(判司宰寺事)가 되었다.
당시 몽고병이 북쪽 변경을 침범했는데, 지병마사(知兵馬事) 홍희(洪熙)가 여색을 좋아하는 데다 군무를 돌보지 않았으므로 그 지방의 민심이 이반하였는데, 김지대가 재략이 있다 하여 첨서추밀원사(簽書樞密院事)로 승진시켜 홍희를 대신해 지키게 하자, 은혜를 베풀고 믿음을 주어 위무하니 서북 40여 성이 이에 힘입어 안정되었다. 원종(元宗) 초 정당문학 이부상서(政堂文學 吏部尙書)에 제배되었으나, 얼마 안 되어 글을 올려 늙었음을 이유로 퇴직을 청하니 수태부 중서시랑평장사(守太傅 中書侍郞平章事)를 더한 뒤 치사(致仕)하게 하였다. 병이 들자 삭발하고 좌정한 채 세상을 떠나니 나이 77세였으며, 시호를 영헌(英憲)이라 하였다. 처음에 김지대가 도성 남쪽에 사는 어떤 노인이 성명(星命)을 잘 헤아린다 하여 그를 찾아가 봤다. 노인이 맞아들여 추점(推占)하고는 인하여 어린 딸로 하여금 뜰아래에서 절하라 하면서 말하기를, “이 공께서는 뒷날 반드시 귀하게 되어 네가 은혜를 입게 될 것이니 삼가 알아두어라.”고 하였다. 20년 뒤, 김지대가 전라도안찰사(全羅道按察使)로 있을 때 도적의 무리를 많이 옥에 가두었다. 김지대가 죄수를 조사하고 있는데, 한 부인이 호소하면서 말하기를, “옛날 도성 남쪽에 살던 늙은이의 딸입니다. 불행하게도 이 지경이 이르게 되었습니다.”라고 하였다. 김지대가 깜짝 놀라 풀어주게 하고는 후하게 위로하면서 그 부인을 내보냈다.
金之岱, 初名仲龍, 淸道人. 風姿魁梧, 倜儻有大志, 力學能文. 高宗四年, 江東之役, 代其父, 隷軍隊以行. 隊卒皆於楯頭畫奇獸, 之岱獨作詩, 書之曰, “國患臣之患, 親憂子所憂. 代親如報國, 忠孝可雙修” 元帥趙冲點兵, 見之驚問, 召入內廂, 器使之. 明年, 冲知貢擧, 之岱擢第一名. 例補全州司錄, 恤孤寡, 抑强豪, 發摘如神, 吏民敬畏. 入拜寶文閣校勘, 後爲全羅道按察使.
崔怡子僧萬全, 住珍島一寺, 其徒橫恣. 號通知者尤甚, 其所請謁, 之岱皆抑不行. 嘗至其寺, 萬全慢罵不見. 之岱直入升堂, 堂上有樂器, 乃橫笛數弄, 操琴鼓之, 音節悲壯. 萬全欣然出曰, “適有微疾, 不知公至此.” 相與歡飮. 因托以十餘事, 之岱卽行之, 留數事曰, “至行營乃可爲耳, 宜遣通知相候.” 還營數日, 通知果至, 之岱命縛之, 數其不法, 投之江. 萬全卽沆也, 雖挾前憾, 以之岱廉謹少過, 竟莫能害. 累遷判司宰事.
時蒙古兵犯北邊, 知兵馬事洪熙嗜女色, 不恤軍務, 一方離心, 以之岱有才略, 陞簽書樞密院事, 代熙出鎭, 撫以恩信, 西北四十餘城, 賴以安. 元宗初, 拜政堂文學·吏部尙書, 未幾, 上章請老, 加守太傅·中書侍郞平章事致仕. 得疾, 剃髮坐逝, 年七十七, 謚英憲. 初之岱聞城南有叟, 善星命, 往見之. 叟迎入推占, 因令少女拜庭下云, “此公, 後必貴, 汝蒙其賜, 謹識之.” 後二十年, 之岱按全羅時, 賊黨多繫獄. 之岱按囚, 一婦呼曰, “舊日城南叟女也. 不幸至此.” 之岱驚駭命釋, 厚慰而遣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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