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textsf{나라의 걱정은 신하의 걱정이요,}\\ \textsf{어버이의 근심은 곧 아들의 근심이니}\\ \textsf{어버이를 대신하여 나라에 보답하면,}\\ \textsf{충성과 효도를 둘다 닦는 격이다.} $$
시조(始祖)公께서 전장(戰場)에 나가시면서 남기신 명시(名詩), 순두시(盾頭詩)$^{\color{saddlebrown}{1)}}$이다. 당시 전장의 다른 병사들은 방패머리에 기이한 동물그림을 그려 요행을 바랐다고 한다. 그러나, 시조공은 이 한시(漢詩)를 방패머리에 적어 놓았다. 이것을 본 당시의 지휘관 문정공 조충이 그 내력(來歷)을 묻고 감탄하여 발탁(拔擢), 기용(起用)했다. 그후 자손들은 <충효쌍수(忠孝雙修)>를 가훈(家訓)으로 삼고 7백여년 동안 실행에 옮겨왔다. 경남 밀양시 청도면 두곡리에 있는 청도김씨 대종재사(大宗齋舍)의 이름도 <쌍수당(雙修堂)>이다.
[註] : 2024년 대종회 총회에서 ´盾頭詩´와 ´楯頭詩´를 놓고 토론을 하여 ´盾頭詩´로 하기로 함. 순두시에 대하여 ‘현재 ´盾頭詩´와 ´楯頭詩´가 혼용되고 있는바, 이를 세심히 검토한 바, 사전을 찾아보니 글자에 대하여 여러 뜻(훈, 訓)이 있으나 ´盾´의 대표적인 訓은 ´방패 순´이고 ´楯´의 대표적인 訓은 ´난간 순´이다. 그러므로 앞으로 우리 문중에서는 ´盾頭詩´로 통일하는 것이 어떠한가’라고 물은즉 참석 종원 전원은 이의 없이 이를 가결하다.
아래에 계명(啓明)대학교 한문학과 이종문(李鍾文)교수님의 논문에서 순두시 일화(逸話)에 대한 내용을 일부 인용한다.
이 일화 속에는 金之岱의 정신 세계가 보다 분명하고 강렬한 형태로 투영되어 있다. 아버지를 대신하여 출정을 한다는 그 자체부터가 이미 그렇지만, 출정하면서 지었다는 한시의 내용이나 정서의 質이 그러하고, 한시를 방패에 붙이는 행위도 역시 그렇다. 요컨대 이 일련의 행위 속에는 유교적 윤리 의식의 바탕을 이루는 국가에 대한 충성심과 부모에 대한 효심이 도저한 무게로 깔려있으며, 이러한 점에서 金之岱는 유교 문화가 보편화된 중세 사회에서 추구하는 이상적인 인물의 한 典型이라고 이를 만하다. 그가 趙冲에 의하여 특별히 발탁될 수 있었던 것이나, 유교 문화가 보다 견고한 형태로 토착화되었던 조선조 識者들에 의하여 적지 않은 찬사를 받았던 것도, 바로 이 일화에 투영되어 있는 忠孝雙修의 강렬한 상징성 때문임은 말할 것도 없는 사실이다.
(李鍾文,「金之岱의 生涯와 詩世界」(啓明漢文學會,『漢文學硏究』, 제17집, 2003), pp.31-49.)
간혹 순두시(楯頭詩)의 '순'字를 '楯'이 아닌 '盾'으로 적기도 하나 옛 문헌 등에서 같은 뜻이라도 '盾'이 아닌 '楯'으로 표기하였다. 고문헌에 따르는 것이 원칙이다. 어원으로 볼 때 '盾'은 '楯'의 약자로 나타난 것이다.
일반적으로 시조공께서 남기신 위 시의 시제(詩題)를 순두시(楯頭詩)라 칭하나 순두시(楯頭詩)는 시제라기 보다도 방패머리에 적어넣었기에 순두시(楯頭詩)로 불리운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위 싯귀중 '대친여보국(代親如報國)'에 대하여 문중이나 일반 학자들이 '아버지를 대신하여 전장에 나가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으나, 이 구절을 그렇게 단순하게 해석해서는 안될 것이다. 당시에 公의 아버지는 적어도 연령이 50세가 넘었을 때이다. 軍에 입대할 나이가 이미 지난 것이다. 더욱이 아버지는 높은 관직에 있었다. 따라서 아버지가 꼭 군에 입대하여야 할 것을 아들이 대신했다는 의미가 아닌 것이다. 단지, 아버지가 나라의 재상으로 국가의 변란을 걱정하고 있었고, 이에 公은 신라 경순왕의 후손으로서, 화랑의 후예답게 화랑오계(花郞五戒)의 忠孝를 실천코자 즉, 나라와 아버지의 근심을 덜어드리고자 분연히 전장에 나선 것이다. 즉 '아버지의 근심을 대신하여 나라에 보답한다'라는 의미로 해석하여야 할 것이다.
요즘 일부 권력이나 재력을 가진 사람들의 자식들이 곧잘 병역을 기피하는 것을 보면 公의 숭고한 뜻에 더욱 고개가 절로 숙여지는 것이다.
출처 : 세보 및 대종지 오기 발굴자료 보고(청도김씨 종사위원회 펴냄, 책임조사 金丁鉉) P.2
시조공의 명시(名詩) 순두시는 신증동국여지승람 제26권 경상도(慶尙道) 청도군(淸道郡)의 [인물]편에 시조공에 대한 소개와 함께 실려있다.
【인물】 고려 김지대(金之岱) 처음 이름은 중룡이었다. 학문을 힘쓰고 글을 잘하며, 풍모가 헌출하고 깨끗하며 척당(倜儻)하여 큰 뜻을 가졌다. 고종 때 강동(江東) 싸움에 아버지가 군대에 참여하게 되자 지대가 태학생(太學生)으로서 아버지를 대신하여 나갔다. 전사(戰士)들이 방패 머리에 모두 기이한 짐승을 그렸는데, 지대는 홀로 한 절구(絶句)를 쓰기를, “나라 걱정이 신하의 걱정이요, 어버이 근심이 자식의 근심일세. 어버이를 대신하여 보국(報國)하면 충과 효를 다 닦을 수 있네.” 하였다. 원수(元帥) 조충(趙冲)이 군사를 점열하다가 보고 놀라서 그 까닭을 묻고, 그 사람됨을 알아서 일을 시켰다. 이듬해 기묘년에 개선하여 돌아와서 과거에 1등으로 합격하니, 규례에 따라 전주 사록참군(全州司錄參軍)을 제수받았다. 드센 자를 누르고 외로운 자를 돌보아주며, 귀신같이 일을 적발하였다. 뒤에 전라도를 안찰(按察)하러 나가서는 최항(崔沆)이 보낸 중 통지(僧通知)를 강 속에 빠뜨려 죽였다. 최항이 아버지를 이어 정권을 잡자 비록 전의 유감을 품고 있었으나 지대가 청렴하고 삼가서 허물이 적었기 때문에 해칠 수 없었다. 지위는 중서시랑 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에 이르렀고, 시호는 영헌(英憲)이다. 김선장(金善莊). 김한귀(金漢貴) 감찰대부(監察大夫)이었다. 공민왕이 그 청을 쫓아서 본현을 지군사(知郡事) 고을로 승격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