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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8年(고종45년) 몽고병(蒙古兵)이 서북도(현 평안북도 압록강 지역과 함경남도 북방 일부) 변방 침범시 당시 지병마사(知兵馬事) 홍희(洪熙)대신에 시조공을 북계지병마사(北界知兵馬事)로 하여 그 지역의 진무(鎭撫)를 맡기니 선정(善政)으로 백성들의 민심을 달래어 그들과 합심하여 서북쪽의 40여 성이 몽고병에게 유린되는 것을 막았다. 이 정란비는 시조공께서 서북도를 진무((鎭撫)하고 돌아온 그곳에는 후일 백성들과 관리들에 의해 세워진 비(碑)이다. 이 정란비에 대하여 김정현님의 저서『영헌공김지대』에 상세히 소개되어 있으니 아래와 같다.

··· 공의 힘으로 서북도 안정을 되찾은 것인데, 그곳에서 얼마간을 근무했는지는 기록이 없으나 이후 7년이 지나서 공은 졸하였는데 공이 졸한 후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정란비 (靖亂碑)가 있는 것을 후손이 뒤늦게 발견하였다. 그 후손은 김주용(金周用)이라는 사람이었다. 1885년 청도 출신인 박풍혁(朴酆赫) 장진군수(長津郡守)로 부터 영헌공의 공적비가 노석파(老石坡)라는 곳에 있는 것을 보았다는 얘기가 전해지고 난 후 뒤늦게나마 김주용은 짐짓 현장을 찾아가 보았던 것이다. 장진은 함경도에 있는 곳으로 장진과 함흥 사이에 황초령(黃草嶺)이라는 고개가 있다. 그 고개의 남쪽 편에 노석파라 부르는 곳이 있는데 김주용이 본 정난비(靖亂碑)는 상당히 마모되고 파손된 비였다. 당시만 해도 6백년 가까운 긴 세월이였음에도 비록 파괴된 비나마 볼 수 있었던 것은 다행이라 하였다. 김주용이 현지의 인근 주민들로부터 들은 바로는 공을 기리는 제사가 집집마다 있었다고 하며, 비가 파손된 것은 뒷날 전란 때 되놈(몽고) 등이 공의 공적을 시기하여 파괴한 것이라 하였다. 그들의 파괴가 있은 후 주민들은 그 비를 다시 거두어 보수하여 세워 제를 지내고 하였는데 후에 폭우에 휩쓸려 떠내려가 일부 글자만 현존하게 된 것이라 하였다.

비면을 보면「祿大夫平英憲(록대부평영헌)」등의 글자가 있고, 오른쪽에「諱之岱鰲山(휘지대오산)」등 글자가 있으며 뒤쪽에는「恩威俱浹(은위구협)•朔漠快晴(삭막쾌청)•德被萬民(덕피만민)•功致太平(공치태평)」이라는 글이 적혀 있다고 전하였다. 뒤쪽에 있는 글을 풀이하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은혜로움과 위엄이 함께 있어서 변방이 혼란에서 쾌청하였다. 덕은 만민에게 가득 보였으니 태평하였다」

이 비석에서 떼어져 나간 부분에서는「英憲公」세 글자가 보였고 또 한 조각에는「之」라는 글자가 반쯤 있는 것을 보 았고「于頌(우송)」이란 글자가 있는 비 조각도 보았다고 하였다. 「于頌(우송)」은 칭송한다는 뜻이 있는 것으로 김주용에게 비의 위치와 그간 전해 내려 왔던 이야기와 비문에 적힌 글 귀를 아는데 협조를 해준 사람은 한과현(韓果鉉)이라는 현지 주민과 한병종(韓棅宗)이라는 함홍지역 인사(人士)라 하였다. 이 정란비가 그대로 보존되었더라면 상당한 사적 가치가 있었음은 물론이고 나라에서 보존하고 유지시켜야 할 가치를지니고 있는 것으로 비록 파손되어 있다 하더라도 부분이나마 찾게 된다면 마찬가지로 보존 가치를 지니게 될 것으로 여겨진다. 당시 몽고 침입으로부터 얼마나 많은 고통과 피해 를 입었는지 그 증거가 되기도 하기 때문에 의미가 있는 것이고, 비문에 새겨진 글씨체와 고려조 명사의 글씨로서 더욱이 상당히 오래된 글씨이고 보면 금석문(金石文)으로 가치를 보여 주는 것이라 할 수 었는 것이다. 현지 주민으로부터 전해지는 이야기에서 그 정란비가 분명 몽고인에 의해 파손되었다고 하는 것으로 보면 조선조에 와 서 누가 뒤늦게 세운 것이라 볼 수 없는 것이다. 그 비에서 특기할 것은 고려사나 고려사절요에서 오산군(鰲山君)이라는 봉호를 기록한 것을 보지 못하는데 분명 그런 봉호가 있었다는 사실을 입증해 주는 것이어서 후손들에게는 상당한 의미가 있는 것이다. 영헌공(英憲公)이라는 시호도 비에 새겨져 있는 것으로 공의 업적이 졸후에 기록되었음을 짐작케 한다. 서북도를 안정 시키고 난 후에 7년이 지나서 공은 졸했던 것이다. 시호는 공신에게 졸후에 하사하는 것이다. 서북도 정란에 큰 공을 세운 후 오산군이란 봉호를 받았던 김지대였다. 뜻있 는 사학자가 있으면 지금이라도 북한의 사학계에 연락하여 그 정란비가 있는지 알아보고 있다면 계속 보존을 해줄 것을 부탁해야 할 것이다. 황초령에는 신라 진흥왕의 순수비가 있었던 곳이다. 정란비도 마찬가지로 분명 가치가 있는 것이다.

서북도정란비(西北道靖亂碑)

소재지(所在地) 함흥(咸興)과 장진(長津) 경계선 부근 황초령(黃草嶺) 남측 노석파(老石坡)
발견(發見) 1855년 청도(淸道) 출신 박풍혁(朴酆赫, 당시 장진군수)
모사(模寫) 영헌공실기(英憲公實紀) 초판 직전 후손 주용(周用) 모사(模寫) 기고(寄稿)

출처 : 김정현(金丁鉉),『영헌공김지대』,도서출판고산자의후예들, 2004, pp.4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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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에 간행된 『회당선생문집(晦堂先生文集)』 33卷의 비명(碑銘)을 뫃아놓은 부분에 시조공의 서북도정란비에 관한 부분이 있어 이를 유교넷에서 발췌하여 게재함. 출처:http://www.ugyo.net/cf/frm/ykFrm.jsp?CODE1=01&CODE2=01&CLSS=A001&B_SUJI_ID=KSAC_M_A12000090&B_BOOK_ID=&B_KWON_ID=&B_STYLE_ID=&B_KISA_ID=&SHKW=張錫英

회당선생문집 (晦堂先生文集)

『회당선생문집』은 근세의 학자 장석영(張錫英 ; 1851∼1926)의 시문집이다. 장석영의 본관은 인동(仁同). 일명 석교(碩敎). 호는 회당(晦堂). 경상북도 칠곡출신이다. 이 책은 1932년 후손 익원(翼遠)이 편집, 간행하였다.

장석영은 1905년 일제가 무력으로 위협하여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고 국권을 박탈하자 통분하여 일제침략을 규탄하고 을사조약의 파기와 을사오적의 처형을 요청하는 「청참오적소(請斬五賊疏)」를 이승희(李承熙)·곽종석(郭鍾錫)과 함께 올렸다. 1907년 대구에서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나 전국에 파급될 때 칠곡지방의 국채보상회 회장으로 추대되어 활동하였다. 3·1운동이 일어나자 곽종석·김창숙(金昌淑) 등과 협의하여 파리평화회의에 제출할 독립청원서 초안을 작성하였으며, 성주 장날의 독립만세운동에 적극 참가하였다가 일본경찰에 붙잡혀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였다. 1925년 제2차 유림단운동이 있을 때 영남대표로 활동하였다.

金英憲公靖亂碑

鰲山金君泰麟基萬踵門而告之曰:我先君高麗太傅

▣ 053 鰲山君 英憲公、德冠一時、功蓋三韓、聲名文物載之太常、播 之輿誌赫赫人耳目、而獨其西北靖亂其蹟甚異、請爲長 者誦之。高宗戊午、蒙人犯北邊、朝野震動。兵馬使洪熙不 恤軍務、一方離散。朝廷擧公才略、陞簽書樞密院事代熙 出鎭。撫以恩信、民知向義、賊服其威、四十餘城賴以全安、 是以西北之人家尸戶祝、雖百世而不忘也。上皇乙酉 間、郡人朴酆赫出宰長津、所經北路見剝落一大碑、有英 憲字歸語之、旣而朴沒不詳。後孫周用轉客北鄙、所往輒 問之、有韓生果鉉、言長津之南有黃草嶺、其南有宿石坡、 坡有金英憲靖亂之碑。胡人害功高、乘其亂斷之、士人追

▣ 054 念公功德、求其斷者失上下左右、得中二片、立之後被水 囓漂去、咸興士人韓棅宗其言如此。往卯韓果、驗且云、今 記得碑面剝、只見得祿太夫平英憲 鰲山諱之垈等字、其 陰有文曰、恩威俱浹、朔漠快晴、德被萬民、功致太平。如其 言往求之、最後於沙壑中得一片、有英憲公三大字之垈 存之半旁、有于頌二字陰銘、尙無恙、遂臨摹以歸。先君有 詩文幾篇、而將重棗以壽附以事行、而此不可以無識、宜 長德之有二言而諗後也。余惟人事之顯晦、天也。淮碑踣 斷、尙令人膾炙於千載。峴石苔剝、猶不禁行人之淚。今公 之英風壯蹟固不在乎此碑之存亡。然第其碑陰之銘、曆

▣ 055 不盡於窮山沙磧、而千載之下足以想像其風猷輝煌璀 璨、與天壤而俱弊、此蓋天之不使之終晦、而其顯有時。嗚 呼。是可記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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