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려사 > 지 권제11 > 지리2(地理 二) > 경상도 > 밀성군 > 청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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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도군 청도군(淸道郡)은 【도주(道州)라고도 한다.】 고려(高麗) 초에 신라(新羅)의 대성군(大城郡)과 오악(烏岳)·형산(荊山)·소산(蘇山)의 세 현(縣)을 합하여 군(郡)이 되었고, 〈밀성군에〉 내속(來屬)하였다. 예종(睿宗) 4년(1109)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충혜왕(忠惠王) 후4년(1343)에 고을 사람 상호군(上護軍) 김선장(金善莊)이 공을 세웠다고 하여, 지군사(知郡事)로 승격하였다가, 이듬해에 다시 감무(監務)가 되었다. 공민왕(恭愍王) 15년(1366)에 고을 사람 김한귀(金漢貴)가 감찰대부(監察大夫)가 되어 다시 요청하자, 승격시켜 지군사(知郡事)가 되었다.

청도군 淸道郡【一云道州】高麗初, 合新羅大城郡·烏岳·荊山·蘇山三縣, 爲郡, 來屬. 睿宗四年, 置監務. 忠惠王後四年, 以郡人上護軍金善莊有功, 陞知郡事, 明年, 復爲監務. 恭愍王十五年, 郡人金漢貴, 爲監察大夫, 復請, 陞爲知郡事.

이상 출처 : 고려사 志 권제11 https://db.history.go.kr/goryeo/compareViewer.do?levelId=kr_057r_0010_0010_0070_0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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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증동국여지승람 26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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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고려 김지대(金之岱) 처음 이름은 충룡이었다. 학문을 힘쓰고 글을 잘하며, 풍모가 헌출하고 깨끗하며 척당(倜儻)하여 큰 뜻을 가졌다. 고종 때 강동(江東) 싸움에 아버지가 군대에 참여하게 되자 지대가 태학생(太學生)으로서 아버지를 대신하여 나갔다. 전사(戰士)들이 방패 머리에 모두 기이한 짐승을 그렸는데, 지대는 홀로 한 절구(絶句)를 쓰기를, “나라 걱정이 신하의 걱정이요, 어버이 근심이 자식의 근심일세. 어버이를 대신하여 보국(報國)하면 충과 효를 다 닦을 수 있네.” 하였다. 원수(元帥) 조충(趙冲)이 군사를 점열하다가 보고 놀라서 그 까닭을 묻고, 그 사람됨을 알아서 일을 시켰다. 이듬해 기묘년에 개선하여 돌아와서 과거에 1등으로 합격하니, 규례에 따라 전주 사록참군(全州司錄參軍)을 제수받았다. 드센 자를 누르고 외로운 자를 돌보아주며, 귀신같이 일을 적발하였다. 뒤에 전라도를 안찰(按察)하러 나가서는 최항(崔沆)이 보낸 중 통지(僧通知)를 강 속에 빠뜨려 죽였다. 최항이 아버지를 이어 정권을 잡자 비록 전의 유감을 품고 있었으나 지대가 청렴하고 삼가서 허물이 적었기 때문에 해칠 수 없었다. 지위는 중서시랑 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에 이르렀고, 시호는 영헌(英憲)이다. 김선장(金善莊). 김한귀(金漢貴) 감찰대부(監察大夫)이었다. 공민왕이 그 청을 쫓아서 본현을 지군사(知郡事) 고을로 승격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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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년(生沒年) 미상(未詳). 본관(本貫)은 청도(淸道).

1340년(충혜왕 복위 1) 충혜왕의 실정(失政)을 계기(契機)로 조적의 난(亂)이 일어난 뒤 왕이 원나라에 불려갈 때, 대호군(大護軍)으로서 호종한 공으로 1342년에 일등공신이 되어 후손들까지 은전을 받았고, 그해에 신궁건축의 감독관이 되기도 하였다.

이듬해 왕이 원나라의 사신 대경(大卿)·타적(朶赤) 등에게 구타당하고 압송되자 시종하는 무리들이 모두 도망갔으나, 응양군(鷹揚軍)으로서 창을 맞고 피를 흘리면서 끝까지 호송하였다.

원나라에서도 충혜왕을 미워하던 자정원사(資政院使) 고용보(高龍普)에게 잡혀 투옥되었으나, 그뒤 귀국하여 1343년에 원나라로부터 충혜왕을 호종한 공로를 인정받아 출신지인 청도군의 지군사(知郡事)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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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의 글은 경상북도청에서 운영하는 '이지홈'이라는 홈페이지(http://www.easyhome.go.kr)의 '자랑스런 경북인들'이라는 코너에 실린 글입니다.

선생의 휘는 선장(善莊)이요 본관은 청도(淸道)로 영헌공 김지대(英憲公 金之岱)선생의 아들이다. 선생은 감찰어사(監察御史)를 지냈고 고려 충혜왕(忠惠王)때에 조적(曺頔)의 난리를 평정하였다. 왕이 교지(敎旨)를 내려 말하기를 <시종(侍從)하는 신하가 처음이나 마침에 한결 같이 과궁(寡躬:임금)을 곁에서 도왔으니 그 공이 매우 크다 황하(黃河)가 띠와 같이 쫍아지고 태산(泰山)이 숫돌과 같이 평평하게 될때 까지 잊을 수 없다>라고 하였다.

1340년(충혜왕 복위 1년) 조적의 난이 일어난 후 왕이 원나라에 불리어 갈 때 대호군(大護軍)으로서 왕을 호종(扈從)한 공으로 1342년(충혜왕 3년)에 1등 공신이 되어 공신각(功臣閣)의 벽에 얼글을 그렸다. 선생의 공으로 청도군의 격(格)을 승격하여 주치(州治)로 하고 도주(道州)라 불리우게 된것 같다.

이듬해에 왕이 원나라에 잡혀 간 후 환관 고용보(高龍普)에게 잡혀 투옥 되었다. 이로 인해 청도군이 격하되 청도현으로 뒤돌아 간 것으로 추측된다. 선생이 졸한후 왕이 관음방(觀音房)에 행차 하였는데 이는 벽신(壁臣)인 선생의 기일재를 베푼 때문이라 하였다.

조적(曺頔)의 난은 고려 제27대 충숙왕이 죽자 1339년(충숙왕 8년)에 왕위계승(王位繼承)의 쟁탈전이 일어나서 심왕 고(瀋王 暠)의 당파인 조적이 병(兵)을 일으커 왕궁을 내습(來襲)하다가 조적은 패주(敗誅)되고 고(暠)는 원나라로 도망한 후 전왕인 충혜왕(忠惠王)이 재차 왕위에 올랐다.

참고문헌 : 영헌공실기, 동국여지승람, 도주지, 도주문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