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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명(啓明)대학교 한문학과  이종문(李鍾文)교수님의 논문 '金之岱의 生涯와 詩世界'에 보면 아래와 같은 내용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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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金之岱의 면모를 더할 나위 없이 강렬하고 오연한 이미지로 부각시키는 것은 역시 그 당시 崔氏政權의 집정자였던 崔怡의 아들 崔沆과의 사이에 있었던 다음과 같은 逸話이다.

뒤에 全羅道 按察使가 되었다. 중이 된 崔怡의 아들 萬全이 珍島에 있는 어느 절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그 무리들이 橫暴하고 放恣하게 굴었다. 그 가운데서도 通知라는 자가 더욱 더 심했는데, 之岱는 그의 청탁을 죄다 물리치고 시행하지 않았다. 일찍이 그 절에 갔더니 萬全이 거만하게 만나지도 않았다. 之岱가 바로 들어가 堂에 오르니 樂器가 있었으므로 드디어 橫笛으로 몇 曲調를 연주하고 거문고를 잡고 두드리니 그 音節이 悲壯하였다. 萬全이 欣然히 나와서 "마침 사소한 병이 있어서 公이 여기 온 줄 몰랐습니다" 라고 말하고 서로 더불어 즐겁게 마셨는데, 이를 기회 삼아 열 몇 가지 일을 청탁하였다. 之岱가 즉시 시행하고 몇 가지 일을 보류하면서 "行營에 가야 할 수 있는 일이니 通知를 보내주면 같이 살피도록 하겠습니다"라고 했다. 行營으로 돌아온 지 몇 일 뒤에 과연 通知가 찾아오자 之岱가 그를 묶도록 명령하고 그 不法 행위를 하나 하나 헤아린 뒤 강물 속에다 던져버렸다. 萬全은 곧 崔沆인데, 비록 앞의 일로 유감을 품고 있었으나 之岱가 청렴하고 삼가며 이렇다할 허물이 없었기 때문에 끝끝내 헤칠 도리가 없었다. …

(李鍾文,「金之岱의 生涯와 詩世界」(啓明漢文學會,『漢文學硏究』, 제17집, 2003), pp.3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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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논문에서 최항의 아들 만전이 머물렀다고 한 진도의 어느 절은 바로 용장사(龍藏寺)이다. 용장사(龍藏寺)는 고려 무신정권 때의 장수 배중손(裵仲孫)이 이끌던 삼별초가 몽골의 침략에 대항하여 항쟁을 벌였던 진도 용장산성(龍藏山城; 사적 제126호) 내에 있는 고려시대 사찰이다. 1756년(영조 32) 김몽규(金夢奎 1694~1775)가 편찬한 진도군 읍지인 <옥주지 沃州誌>와 <진도군지>를 근거로 용장사는 고려 태조 때의 후진국(後晋國) 고왕(高王, 재위 936~943) 때 또는 고려 고종(高宗, 재위 1213∼1259) 때 초창된 것으로 추정되지만 확실한 것은 아니라고 한다. 용장사지 가까이에 근래에 복원한 용장사(한국불교태고종 사찰)가 있으며, 이곳 약사전에 고려시대에 제작된 약사삼존불상인 ‘용장사 석불좌상(龍蔣寺石佛坐像, 전라남도유형문화재 제17호)’이 모셔져 있다.

이 용장사에서 멀지않은 곳에 벽파진(碧波津)이 있다. 벽파진(碧波津)은 전남 진도군 진도(珍島) 동부 해안가에 있던 나루터로, 본래 국방상 중요지역의 하나였던 진도의 관문 역할을 하던 곳이다. 지금도 목포~완도 간, 목포~제주 간을 잇는 여객선의 기착지이다. 임진왜란 ·정유재란 때에는 수군영(水軍營)을 두었으며 이순신(李舜臣)의 전첩비(戰捷碑)가 있다. 위 논문에서 시조공이 만전의 부하인 통지를 강물에 던졌다는 그 강이 바로 벽파진이 아닌가 하는 의견이 있다. 그 근거는 용장사 근처에 이렇다할 강이 없고, 진도향토사에는 통지를 바다에 던져 죽인것으로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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