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淸道金門은 始祖公의 아들인 2世부터 6世까지 幽宅이 실전되고, 7世 호강공 선조님은 유택이 이북에 있어 先代 六位의 祭를 올리지 못하여 祭壇을 마련하는 것이 숙원이었다.
그간 享祀 未奉行 先代 祭壇 근수는 대종회 총회 등 종중모임에서 수차 거론이 되었으며, 2014.3.19. 대종회 원로회의에서도 선대6위의 제단을 설치하는 것으로 최종 결론이 나 2015년 9월에 착공을 하여 2016년 5월에 준공이 되었다.
이제 숙원사업이었던 선대6위 제단(祭壇)이 완공되었으니 숭조목종의 정신으로 우리 문중이 화합하고 발전하는 계기가 되기를 염원하다.
소재지 : 청도군 청도읍 상리 염수당 좌측
淸道金氏家門은 高麗 高宗 때 太學生의 몸으로 아버님을 대신해 出征하여 契丹軍의 侵攻을 물리치고 輔國安民의 偉業을 이룩한 諱 之岱 諡 英憲公을 始祖로 하는 承世繼代의 名門巨族입니다. 특히 英憲公은 방패에 詩를 써서 마음을 다짐하는 盾頭詩 一首로 代親報國하는 忠孝雙修 의 意氣를 表明함으로서 臨戰士氣의 振作과 아울러 軍官民으로 하여금 護國意志의 鼓吹를 통하여 高麗人의 氣槪를 떨치는 表象으로 떠올랐으며 그때부터 淸道金氏家門은 賢祖良孫의 名聲을 이어왔습니다. 그러나 蒙古族이 中原을 支配하는 元代에 이르러 隣接國의 戰患餘波가 高麗에까지 미치는 內憂外患이 날로 더해갔습니다. 그런 渦中에서도 淸道金氏門中의 先祖들께서는 國恥民辱으로 부터 忠君輔國의 衷情을 다하였습니다. 二世祖 諱 善莊公 三世祖 諱 得齊公 四世祖 諱 福基公 五世祖 諱 仁秀公 六世祖 諱 漢貴公 七世祖 諱 潾公은 高麗 二十五代 忠烈王이 元의 强迫 等으로 先代王 元宗이후부터 諡號마저 宗에서 王으로 格降 당하는 受侮를 겪게 되었습니다. 忠烈王에서 恭愍王으로 이어지는 國格 沈下의 羞恥를 堪耐하기 어려운 政變의 渦中에 失傳의 不運을 避해가지 못하였습니다.
嗚呼痛哉라! 失傳의 恨을 달래며 復原의 길을 찾아 勞心焦思해온 그 星霜이 얼마이며, 仰天號哭으로 世上을 怨望하심이 그 얼마이며, 尋痕追跡의 巡踏勞役이 그 얼마이며, 空谷傳聲의 呼先絶叫하심이 그 얼마이며, 不孝自責과 悔恨望祭奉行이 그 얼마였습니까.
强國風勢를 더해가는 當時의 蒙古族과는 道德感情이 相通하는 文隣이 되기 어려웠을 뿐 아니라 八世祖 이후 近代에 이르기까지 失傳의 不孝感을 품은 채 一縷의 期待를 지니고 海中探珠의 心情으로 盡心竭力하였으나 朝鮮中期에 壬丙兩亂을 거치면서 그 希望은 더욱 멀어져 갔습니다. 現今에도 淚恨의 號哭을 멈추지 못하고 있으나 더 이상 家門의 譽價를 毁傷할 수 없어서 二世祖로부터 七世祖에 이르는 여섯 분의 列先祖 壇碑를 세워 淸道金氏家門의 侍墓行禮의 傳統을 이어가고자 합니다. 부디 上天에서 平安히 머무시며 愚孫들의 哀切한 告諭의 뜻을 感應하사 언제나 변함없이 於昭于天하소서!
揚亭派 | 二千萬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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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河派 棠林派 橋項派 古阜派 | 各 三百萬원 |
高陽派 江東派 | 各 一百萬원 |
炳哲(範谷派) | 一百萬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