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염수당 본채 중수(2022년 8월) 이전의 모습

▲ 염수당 본채 중수(2022년 8월) 이전의 모습

▲ 2005년3월경 촬영된 영상에서 캡춰한 사진으로, 우측의 전사청은 2011년 7월 폭우로 멸실됨.

▲ 2005년3월경 촬영된 영상에서 캡춰한 사진으로, 우측의 전사청은 2011년 7월 폭우로 멸실됨.

▲ 2005년3월경 촬영된 영상에서 캡춰한 사진으로, 전사청 우측의 숙소(파란 지붕) 역시 2011년 7월 폭우로 멸실됨.
예전에 1박2일로 시제와 총회를 할때에는 행사에 참석한 종원들이 이 숙소앞 마당에 화톳불을 피워놓고, 많은 정담과 회포를 나누고 술과 음식을 함께하며 밤을 지새웠음.

▲ 2005년3월경 촬영된 영상에서 캡춰한 사진으로, 전사청 우측의 숙소(파란 지붕) 역시 2011년 7월 폭우로 멸실됨. 예전에 1박2일로 시제와 총회를 할때에는 행사에 참석한 종원들이 이 숙소앞 마당에 화톳불을 피워놓고, 많은 정담과 회포를 나누고 술과 음식을 함께하며 밤을 지새웠음.

▲ 염수당 본채 중수(2022년 8월) 이후의 모습

▲ 염수당 본채 중수(2022년 8월) 이후의 모습

영헌공(英憲公)의 묘실(墓室). 본시 산하(山下)에 병사(丙舍) 두어 칸이 있었으나 규모가 협소하여 1860년(조선조 철종 11년)에 재건(再建)한 대종재사(大宗齋舍). 규모는 정당 5칸(正堂五間), 숙소 6칸(宿所六間), 문루 3칸(門樓三間), 창고 4칸이다.$^{\color{saddlebrown}{1)}}$ 당호가 염수로 붙여진 것은 영헌공의 순두시에 나오는 충효쌍수(忠孝雙修)를 염두에 두고 자자손손 기억하고 내용대로 실행에 임할 것을 소원하여 붙여진 것이다.$^{\color{saddlebrown}{2)}}$

소재지 경북 청도군 청도읍 상리 271번지(지번주소) 경북 청도군 청도읍 한재로 470-80(도로명주소)
찬기인(撰記人) 여강(驪江) 이매구(李邁久)
중수기문(重修記文) 후손(後孫) 재화(在華)

[주1] : 청도김씨대종친회사무소,「淸道金氏大宗誌」, 大譜社, 1993, pp.190 [주2] : 청도김씨대종친회사무소,「淸道金氏大宗誌」, 大譜社, 1993, pp.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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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수당 연대기(年代記)

염수당은 청도김씨 시조이신 휘(諱) 지대(之岱) 시(諡) 영헌공(英憲公)의 묘실로, 본시 시조공을 모신 산하에 병사(丙舍) 두어 칸이 있었으나 오랜 세월로 무너지고, 哲宗庚申(1860년)에 그 자리에 五梁六楹, 正堂五間으로 중건하고 뒤에 東齋三架를 세워 모현재(慕賢齋)라 이르게 되었습니다.$^{\color{saddlebrown}{1)}}$

후일 堂號를 염수당이라 한 것은 시전(詩傳)의 '無念爾祖 聿修厥德'(선조를 기억하여 덕을 닦는다)이라는 글귀와 시조공의 충효쌍수를 염두에 두어 명명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1860년 3월 24일$^{\color{saddlebrown}{2)}}$ 염수당 정당 상량시 幼學 金漢邦께서 '대현재실상량문$^{\color{saddlebrown}{3)}}$'을 撰文하시었습니다. 염수당 중건 이후를 간략히 짚어보면 아래와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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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 대종지(大宗誌)(청도김씨대종친회사무소,「淸道金氏大宗誌」, 大譜社, 1993)의 195면에 '哲廟(철묘:철종)庚申에 五梁六楹을 거듭 세우고 뒤에 東齋三架를 일으키어 현판을 걸어 이르되, 慕賢齋라 하니..'라 되어 있음. [주2] : 대종지(大宗誌)(청도김씨대종친회사무소,「淸道金氏大宗誌」, 大譜社, 1993)의 223~224면에 '1860년 3월 24일 염수당 정당상량시(正堂上樑時)'라 되어 있음. [주3] : 대현재실상량문(大峴齋室上樑文)(청도김씨대종친회사무소,「淸道金氏大宗誌」, 大譜社, 1993, pp.224-232)          본 상량문의 소재에 대해서는 대종지(大宗誌)(청도김씨대종친회사무소,「淸道金氏大宗誌」, 大譜社, 1993)의 223~224면에 상세히 나와 있는바 그 일부를 옮겨보면,          '유학(幼學) 김한방(金漢邦)께서 찬문(撰文)하시고 유학(幼學) 김성곤(金聖坤)께서 한지에 정성껏 찬서(撰書)하시고 포장하시어 상량목 중앙하단부에 밀봉해서 넣어두신 것을 서기1992년 5월 10일부터 8월 20일까지 염수당중보수공사시 상량을 교체하면서 발견하여 원본을 남하종파 찬경(燦京)께서 초본(抄本) 후 원본은 새로 교체한 상량에 옛 그대로 넣어 두었습니다.' 라고 적혀있음.          금번 3차 대중수시 만채 대종회장께서 위 내용을 유념하시어 도목수 김광선에게 개보수시 상량목을 조심해서 다룰것이며 밀봉된 부분이 보이면 즉각 보고해줄것을 말하였고,          8월 15일 상량목을 발견하여 밀봉된 부분을 확인한 결과 1860년에 작성된 대현재실상량문(大峴齋室上樑文)이 무려 162년만에 백일하에 그 경이로운 모습을 보여주게 되었고,          1992년 중수(상량 교체)시 추가로 작성하여 같이 동봉하였던 문건(1장)도 아울러 발견되었음.        금번 3차 대중수시에는 1992년도에 교체한 상량에 기 동봉되었던 두건의 문건과 3차 대중수에 관한 내용을 간략히 적은 문건을 밀봉하여 올림.

▲ 금번 3차 대중수시 발견된 상량목

▲ 금번 3차 대중수시 발견된 상량목

▲ 1860년에 작성된 대현재실상량문(大峴齋室上樑文)과 1992년 중수(상량 교체)시 추가로 작성한 문건의 봉피(封皮)

▲ 1860년에 작성된 대현재실상량문(大峴齋室上樑文)과 1992년 중수(상량 교체)시 추가로 작성한 문건의 봉피(封皮)