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도김씨 계파마을 상주파(尙州派)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상주파(尙州派)는 시조 영헌공(始祖 英憲公) 할아버님의 9세 손 현감공(縣監公) 휘 九鼎 할아버님의 후손으로 경상북도 상주에 자리잡은 계파입니다.

상주시는 경상북도 서북쪽의 내륙에 위치한 도농복합형 도시로서 북부지역의 교통요충지입니다.

고려 충숙왕 원년(1314년)에 경주(慶州)와 상주(尙州)의 머리글자를 따서 경상도(慶尙道)로 개칭한 이후 조선조(朝鮮朝)에서도 그대로 시행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현재 경상도 명칭도 이 때 탄생하였습니다.

금번 청도김씨 홈페이지의 계파마을에 입주한 것을 계기로 상주파 종원여러분의 적극적인 참여와 성원을 기대합니다. 아울러 게시판도 마련하였아오니 상주파 문중의 소식이나 정담(情談)등 좋은 글들을 많이 올려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Ⅰ. 입향조(入鄕祖)와 세거내력(世居來歷)

우리 파의 입향조는 시조 영헌공(始祖 英憲公) 할아버님의 9세 손 현감공(縣監公) 휘 九鼎 할아버님이십니다.

역사적 기록이 유실되어 현감 할아버님에 대한 자세한 거행이나 행장이 전하는 바는 없으나, 고려 말에 황간 감무를 지내시다가 서기 1392년 7월에 이성계(李成桂)(1335-1408)가 고려의 창왕(昌王)을 폐하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는 소식을 들으시고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는 선비정신을 지키고자 벼슬을 과감히 버리고 상주 판곡(板谷 : 너르실)에 은거하셨습니다.

할아버님께서 벼슬을 버리고 숨어 사실만한 곳을 찾으려고 황간 고을 북쪽에 우뚝 솟은 백화산에 오르시어 화령고을을 바라보시니 골짜기가 깊고 수풀이 무성하며 조용해 보이는 골짜기가 있는지라, 그날로 관직을 버리시고 그 곳에 은거하시게 되었습니다. 판곡에 이주하시고서는 백이숙제(伯夷叔弟)처럼 굳은 절개를 지켜 평생토록 세상에 나오지 아니 하셨다고 합니다.

백이와 숙제는 본래 중국의 은(殷)나라 고죽국(孤竹國)의 왕자 형제이었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서로 후계자가 되기를 사양하다가 끝내 두 사람 모두 나라를 떠났는데, 그 무렵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은나라의 주왕(紂王)을 토멸하여 주 왕조(周 王朝)를 세우자, 두 사람은 무왕의 행위가 인의에 위배되는 것이라 하여 주나라의 곡식을 먹기를 거부하고, 수양산에 몸을 숨기고 고사리를 캐어 먹고 지내다가 굶어죽었다고 합니다. 유가(儒家)에는 이들을 청절지사(淸節之士)라 하여 높게 평가하여 왔습니다.

할아버님께서는 시조할아버님의 『忠孝雙修(충효쌍수)』의 가르침과 고결한 선비정신을 본받아 불의에 타협하지 않는 청절지사의 길을 택하신 것입니다. 우리 시조 영헌공 할아버님께서 고려 무신정권의 집권자 최충헌(崔忠憲 : 1149-1219)의 손자이자 최우(崔愚 : ?-1249, 후에 최이(崔怡)로 개명함)의 아들인 중(僧) 만전(萬全)이 전라도 진도의 어느 절을 본거지로 하여 수하 무리와 함께 고을 주민에게 횡포를 자행할 때 권력자의 눈치를 보지 아니하고 이를 과감하게 단죄하시고, 나중에 정권을 잡은 만전(최항[崔沆])이 이 사건에 대하여 보복의 기회를 호시탐탐 노렸으나 시조 할아버님께서 청렴결백하시고 공명정대하시므로 오히려 벼슬을 높여주었다는 역사적 사실은 현감 할아버님에게 정신적 유산이 되었을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권력 앞에서는 절개나 의리를 헌신짝처럼 내팽개치고 오직 사리사욕과 개인의 영달에 눈이 멀어 권력을 향해 부나비처럼 달려드는 인간들이 많기 마련인데, 이러한 세태에 영합하지 아니 하고 지조를 지켜 기관은거(棄官隱居 : 벼슬을 버리고 숨어산다는 뜻)한다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닐 것입니다.

이러한 고고한 정신은 이후의 후손들에게도 면면히 이어져 온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특히 14세 휘 준신(俊臣 : 1561-1592) 할아버님의 행적에서 두드러집니다.

준신(俊臣) 할아버님에 관하여 좀 더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할아버님께서는 기골이 장대하고 용모가 단정하셨으며 재주가 뛰어났다고 합니다. 일곱 살 때 동네 아이들과 노는 중에 한 아이가 우물에 빠져 허덕이니 아이들이 모두 도망갔으나 할아버님께서는 침착하게 혼자 두레박 끈을 넣어 아이를 잡게 하고 구출을 시도하셨고, 마침내 어른들이 달려와서 아이를 구출하였다고 합니다. 할아버님은 장성하시면서 병서를 가까이 하고 활쏘기와 말 타기를 익혔습니다. 벽에는 선조의 유훈인『忠孝雙修(충효쌍수)』네 글자를 크게 써 붙이고 바라보며 스스로를 삼가셨다고 합니다.

1592년 임진년에 32세 선비의 신분으로 의병을 모아 임란 최초의 의병장으로 4월 22일 칠곡 석전 금호강변까지 진출하였으나 피난민 대열을 왜적으로 오인한 상주목사 김해(金澥)는 미리 도주하고, 군사들은 왜적의 조총위력에 흩어졌습니다. 할아버님께서는 의분(義憤)하여 남은 병사를 인솔하고 본진으로 돌아와, 고령 전투에서 패하여 돌아와 있던 판관(判官) 권길(權吉)과 군사를 나누어 성을 사수하기로 결의하였으나 순변사(巡邊使) 이일(李鎰 : 1538-1601)이 와서 성을 버리고 북천 자산아래 포진할 것을 명하였습니다. 이미 왜적이 조총으로 무장되어 있음을 아시는 할아버님께서는 적의 조총 앞에 노출되는 개활지(평지)에 포진함은 패배할 것이 명백하므로 부당하다고 간하였지만 이를 묵살 당하였고, 진지구축 중 왜군이 돌진하여 아군은 붕괴되고 이일은 도주하고 권길은 순절하였습니다.

할아버님께서는 단기(單騎)로 적진에 돌진하여 적을 무수히 도륙하고 분전하였으나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종사관 윤섬(尹暹), 박호(朴箎), 이경류(李慶流)와 함께 장렬히 순절하셨습니다.

상주를 함락한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 1562-1611) 휘하의 왜병은 할아버님으로부터 입은 막대한 피해를 보복하기 위하여 할아버님의 본가가 있는 판곡으로 돌진하여 일문을 도륙하기에 이르렀고, 이러한 참극의 와중에 어린이와 노약자, 부녀자들은 봉욕을 피하려고 마을 앞 연못에 투신자정(投身自靖)하니 후세 사람들이 이 연못을 낙화담(落花潭)이라 불렀습니다.

이 연못은 현감 할아버님께서 판곡리에 입주하실 당시 안산인 백화산이 화기(火氣 : 불기운)를 띠고 있어 김씨에게는 해롭다는 풍수지리설에 좇아서 마을 앞에 판 연못인데, 그 때의 넓이는 약 1,500여 평이 넘었다고 하나 지금은 애절한 문중사를 지닌 채 100 평 미만으로 남아 남아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