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도김씨(淸道金氏)의 연원(淵源)

김씨(金氏)

우리나라 성씨(姓氏)중에 서 가장 많은 인구를 가진 대성(大姓)으로 가락국(駕洛國) 수로왕(首露王) 계통과 신라 왕실(王室)의 박, 석, 김 3성중의 하나인 알지(閼智) 계통으로 크게 나뉜다. 우리 청도김씨는 바로 이 알지(閼智) 계통으로 신라의 김씨 왕족 성씨이다.

가락국 원조 (元祖)로 전해오는 수로왕(首露王)은 하늘에서 내려온 여섯의 황금알에서 제일 먼저 태어나 가락국(駕洛國)의 왕이 되었다고 (삼국유사)와 (가락국기)에 전한다.

신라의 알지 계통은 (삼국사기)의 기록에 보면 서기65년(신라 탈해왕9)에 경주 시림(始林)의 나무가지에 걸려있던 금궤에서 태어나 탈해왕이 '하늘에서 내려준 아들'이라 하고 금궤에서 나왔다 하여 성(姓)을 김(金)으로 사성(賜姓)했다고 전한다.

이렇게 시작된 김씨의 후손들은 신라의 56왕 중 38명이 왕계를 누리면서 역사의 흐름 속에서 명문거족(名門巨族)으로 가문의 번성을 이룩하여 이름 있는 신하와 대유학자(大儒學者), 석학자(碩學者)들을 배출시키면서 근세를 잇는 역사적인 사건 속에 명문의 긍지를 살려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청도김씨(淸道金氏) 시조(始祖)

우리 청도김씨(淸道金氏) 의 시조(始祖)이신 김지대(金之岱) 할아버님(1190~1266)은 신라 경순왕(敬順王)의 넷째 아들인 대안군(大安君) 김은열(金殷說)의 후손(後孫)이시다. 서기 1190년(고려 19대 명종(明宗) 20년)에 시중(侍中, 종1품)을 지낸 김여흥(金余興, 水原金氏)의 세째 아들로 태어나시었다. 초휘(初諱)는 중룡(仲龍), 시호(諡號) 는 영헌(英憲)이시다. 영헌공(英憲公)은 태어나실 때부터 풍채가 출중하시고 지혜가 뛰어나셨으며, 장성하면서 시(詩)와 문장에 능하셨음은 물론 뜻도 커서 학문에 정진(精進)하심이 남다르셨다.

公은 고려 고종(高宗)과 원종대(元宗代)의 명신(名臣)으로 1218년(고종 5) 거란(契丹)족이 쳐들어 왔을 때 29세의 나이로 군문(軍門)에 입영하여, 원수(元帥) 조충(趙沖)을 따라 출정(出征)하시었다. 당시 병사들은 방패머리에 기이한 그림을 그려넣곤 했는데 公은 [충효쌍수(忠孝雙修)]를 주제로 하는 名詩, 순두시(盾頭詩)를 써넣으시고 전투에 임하시었으며, 큰 공을 세우시고 이듬해 3월에 개선(凱旋)하시었다.

전장에서 개선해 돌아오시면서, 바로 5월에 문과(文科)에 장원(壯元) 하시어 전주사록(全州司錄)의 보임(補任)을 받으셨다. 이어 보문각교감(寶文閣校勘)에 제배(除拜)되셨으며, 그후 진주목사(晉州牧使)를 하시었다. 1240년(고종 27)에 전라도안찰사(全羅道按察使,정3품)로 나가셔서 선정(善政)을 베푸셨다. 당시 중(僧) 만전(萬全)의 횡포가 심해 지방백성들이 고통을 받고 있음에 公은 만전을 과감히 단죄하였다. 만전은 당시 권력의 핵심인물인 최충헌(崔忠獻)의 손(孫)으로 감히 누구도 그를 어쩌지 못하였으나 公은 개의치 않고 양민을 위해 그의 죄상을 엄정하게 다스린 것이다.

1243년(고종 30) 비서소감(秘書少監,종4품)으로 몽고를 방문하는 사신(使臣)의 임무를 수행하셨고, 1247년(고종 34) 경상도안찰사(慶尙道按察使), 1255년(고종 42) 판사재감사(判司宰監事,정3품)로 과거시험의 동지공거(同知貢擧)를 역임하셨으며, 1258년(고종 45) 북변에 몽고군(蒙古軍)이 침입하자 첨서추밀원사(簽書樞密院事,정3품)로 승진하여 북계지병마사(北界知兵馬事)를 겸직, 몽고군을 격퇴하고 민심을 잘 다스려 서북 40여성(城)을 안정(安定)시켰으며, 이어 추밀원부사(樞密院副事,정3품)와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종2품)를 한달사이에 연속 승진하신 후에 오산(鰲山:청도의 옛 이름)군(君)에 책봉되시었으니 이때가 고종 45년, 公이 69세되시던 해이다.

시조공께서 1258년(고종 45) 군호(君號)를 받으셨기에 우리 청도김씨는 종중(宗中)에서 본관을 만든 것이 아니라 나라에서 본관을 받은 것이다. 이러한 본관은 그렇게 많지 않으며, 따라서 청도김씨는 나라에서 본관을 받은 영광스러운 문중인 것이다.

원종(元宗)이 즉위한 1260년 12월에 정당문학(政堂文學,종2품), 이부상서(吏部尙書)를 지내시고 1261년(원종 2)에 지추밀원사(知樞密院使,정2품)로서 지공거(知貢擧)를 역임하셨으며 후일 평장사(平章事)에 이르렀으며, 말년에 수태부중서시랑평장사(守太傅中書侍郞平章事, 정2품)로 치사(致仕)하시었다.

1266년(고려 원종 7년) 음력 2월 계사일(癸巳日)에 향년77세로 돌아가셨는데 좌서(坐逝)하셨다는 기록이 있다. 좌서란 덕망과 수양이 높은 고승(高僧)들이 꼿꼿이 앉은 채로 돌아가시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고래(古來)에 드문 일이다. 나라에서는 영헌공(英憲公)이라는 시호(諡號)를 내리시었다.

시조 영헌공에 대한 행장(行狀)은 정인지(鄭麟趾)의 고려사, 김종서(金宗瑞)의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서거정(徐居正)의 동국통감(東國通鑑) 등에 적혀있는 것으로 고증되고 있으며 고려시대의 명신(名臣)으로, 청렴결백한 청백리이며 공명정대하게 정사를 수행했던 재상으로 기술(記述)되어 있다. 또한 公은 고려시대 10대 시인에 꼽히시는 분으로, 조선 성종때 대학자인 서거정(徐巨正)이 저술한 동문선(東文選)에도 公의 詩가 여러편 실려있을 정도로 문학사적으로도 높이 평가되고 있다.

시조 영헌공의 후손들은 청도(淸道)를 관향(貫鄕)으로 삼아 고려와 조선조에 걸쳐 명문(名門)으로 명성을 이어오고 있다. 시조(始祖) 묘소(墓所)는 경북 청도군 청도읍 대현상동에 있다. 시조 묘소는 본인이 사관(賜貫)을 받은 땅에 있는 예가 많지 않으나 다행히 우리 문중은 관향에 시조공의 유택을 보존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고려사 열전(列傳)의 시조(始祖)

우리의 관향(貫鄕) 청도(淸道)

청도(淸道)의 역사

경상북도의 남단 중앙에 위치한 우리의 관향 청도는 준험한 산악이 연립(連立)하여 산자수명(山紫水明)하고, 산수(山水)의 정령(精靈)이 인재(人材)를 낳고 사통오달로 교통이 편리할 뿐만 아니라 인문절의(仁文節義)의 예악(禮樂)의 고장이다. 용각산맥이 남북으로 가로질러 산동지방과 산서지방으로 나뉜다. 경지는 산서지방이 산동지방보다 넓어 전체인구의 7할이 산서지방에 모여 산다. 현재 청도는 행정구역으로 경상북도 청도군으로 되어있다. 경산시와 경주시를 이웃하고 있고, 남으로는 경남의 밀양시와 접경을 이루고 있으며 같은 경북지역으로 달성군과도 접경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