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헌공(英憲公)은 익히 알려진 바와 같이 문무(文武)를 겸한 고려말의 위대한 인물이거니와 특히 탁월한 문인이었다는 것이 여러 문헌(文獻)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조선전기의 문신 서거정(徐居正)이 신라에서 조선 초까지 시인들의 시평(詩評)과 일화(逸話)를 실은 동인시화(東人詩話)에서 고려 전기 및 무신집권기를 대표하는 15명의 시인 가운데 영헌공을 포함시키고 있고, 조선 숙종조 대제학이었으며 문사(文士)였던 호곡(壺谷) 남용익(南龍翼)은 그의 호곡시화(壺谷詩話)에서 고려 시대 전체를 대표하는 시인 25명 가운데 한 사람으로 그를 포함시키고 있습니다.$^{\color{saddlebrown}{1)}}$ 뿐만 아니라 영헌공은 서거정(徐居正)등이 시문을 모아 편찬한 시문선집인 동문선(東文選)과 최자(崔滋)의 보한집(補閑集), 이제현(李齊賢)의 역옹패설(櫟翁稗說), 홍만종(洪萬宗의) 소화시평(小華詩評) 등 역대의 시화집(詩話集)에서도 비교적 높은 빈도로 등장하는 시인으로 정지상(鄭知常)과 함께 요체시(拗體詩)로 널리 알려져 있기도 합니다. 또한 조선 후기 영조대 유광익(柳光翼)(1713-1780)은 45종의 방대한 문헌에서 뽑은 야사,야담으로 펴낸 『풍암집화((楓巖輯話)』라는 야사집에 시품(詩品)으로써 명인을 3편으로 나누어 적었는데 그 첫편에 영헌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color{saddlebrown}{2)}}$ 이렇게 볼 때 영헌공은 한 시대를 풍미(風靡)한 탁월한 시인이었다는 것은 공지(共知)의 사실(事實)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영헌공이 고려시대를 대표하는 빼어난 시인 중 한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인 정황에 비추어 볼 때 영헌공은 일생 동안 매우 많은 한시를 지었을 터이지만 현재까지 전하는 작품은 시(詩) 9 수와 2점의 유문(遺文)이 전부이고, 따라서 현존하는 작품만으로는 영헌공의 문학세게(文學世界)를 온전하게 나타내기는 어려운 실정입니다.
한편 영헌공이 남긴 시를 두고 일방적으로 그 물리적 분량이 '적다'고 만 말할 수도 없는 것이 막상 헤아려보면 무신집권기의 문학사에서 영헌공보다 단 한편이라도 더 많은 작품을 남긴 시인은 두 손으로 꼽을 정도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현존하는 영헌공의 시들은 다른 시인들의 그것과는 구별되는 특이한 운율과 남다른 풍격(風格)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문학사적으로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본 영헌공의 유시(遺詩)와 유문(遺文)을 소개함에 있어 본 소개글부터 그 내용까지 계명(啓明)대학교 한문학과 이종문(李鍾文)교수님의 '金之岱의 生涯와 詩世界'라는 논문에서 많은 부분을 인용하였으며, 훌륭한 논문을 발표해주신 이교수님께 이 자리를 빌어 다시한번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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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 호곡시화(壺谷詩話)에서 "김부식(金富軾)은 교건(矯健)함으로, 임춘(林椿)은 분방(奔放)함으로, 김극기(金克己)는 온자(蘊藉)함으로, 이인노(李仁老)는 요묘(要妙)함으로, 김지대(金之岱)는 등초(騰踔)함으로, 홍간(洪侃)은 농려(穠麗)함으로, 이각(李殼)은 순후(醇厚)함으로, 이색(李穡)은 혼박(渾博)함으로, 정몽주(鄭夢周)는 호창(豪暢)함으로"라고 평가함. 출처:청도김씨수첩(김정현(31世/두곡) 고증(考證))
[주2] : 풍암집화(楓巖輯話)에 "김지대(金之岱), 우탁(禹倬), 이재현(李齋賢), 이각(李殼), 한종우(韓宗愈), 안유(安裕), 김구용(金九容), 이색(李穡), 정몽주(鄭夢周), 이숭인(李崇仁), 정도전(鄭道傳)"의 순서로 기록되어 있음. 출처:청도김씨수첩(김정현(31世/두곡) 고증(考證))
구분 | 제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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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遺詩) | [**순두시 |
(盾頭詩)**](https://abalone-flax-26d.notion.site/8ed41cf2390d43c3b276ceaf3bb93c2a) |
유중화 (遊中華) | | 유문(遺文) | 상 경상안무사 최사성 자 하정 장 (上慶尙安撫使崔司成滋賀正狀)